-
-
그리고 죽음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죽음이란 삶의 곧 일부이다.`,`산다는 것 그것 자체가 곧 바로 죽음이다.` 죽음에 관한 이런저런 유명한 표현들이 많다. 죽음을 찬미하는 시적표현도 있거니와 죽음 그 자체로 모든것은 소멸이다라는 지극히 리얼리즘적인 표현도 무수하다. 허나 누가 정녕 알겠는가? 결국 죽음이란 죽어봐야 아는데 안타깝게도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이 책의 시작은 한 중년부부의 죽음으로써 시작한다. 허나 흔히 생각하는 `죽음=끝`의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원제를 보면 `Being dead`다. 쉽게 말해 끝나지 않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그리고 죽음이 아닌 죽음 그리고가 낫지 않았을까?) 소설의 시작부터가 죽음이라.그리고 그것으로 소설이 시작한다.어째 좀 으스스하다.
중년부부의 죽음은 모든 죽음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한 방 펀치를 먹인다. 터져나온 뇌수, 인간의 모든 구멍에서 나오는 참기힘든 냄새의 노폐물. 그리고 그 노폐물을 양식삼아 살아가는 환경의 파수꾼들. 이런 작가의 아주 리얼한 죽음에 대한 직시는 죽음을 찬양하는 `기뻐하십시요. 드디어 괴로운 꿈에서 깨어나시게 되었습니다.` 라는 표현들에 대한 반어적 블랙유머였다.
그럼 과연 이런 죽음에 대한 직시적 관찰표현은 무엇인가?이 책이 죽음 그 자체만으로 내용을 꾸려 나갔다면 이 책은 인생회의적인 분위기에 더불어 그저그런 포스트모더니즘에 국한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희망은 없고 종교도 필요없다. 죽음은 그저 추한 화학적 분해일뿐이다.` 이런 암흑적 분위기에 휩싸이며 책을 덮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죽음은 희망이 있다. 마지막 중년부부의 죽은 모습에서 우리는 미약하나마, 허무하나마 인간생활에서의 작은 희망을 느낄 수 있다.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도 자기 아내의 발목이나마 잡을려고 하는 한 인간의 마지막 몸부림은, 비록 인생말로는 무상하더라도 그 무상한 인생속에서는 집착할만한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것을 보여준다.
죽음은 그러한 것이라면 과연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을 얻어야 할까? 이 책에서 작가는 `흔들기`라는 것으로 산사람의 죽은사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다.죽음은 추하다.하지만 산사람은 그 추함을 이 `흔들기`라는 의식을 통해 승화시켜 준다.그 흔들기의 뿌리가 죽은이가 천국으로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데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 갈망과 함께 죽은이에 대해 추억을 되살림으로써 그의 죽음을 암흑의 구렁텅이가 아닌 어스름 잿빛 애틋함으로 포장한다.
이 흔들기 의식의 완성은 책 중 `실비아`의 몫이였다.언제나 부모를 거부하고 연락조차 거의 두절하고 있던 실비아는, 죽음이란 매개체로 부모와의 단절의 끈을 잇게 된다. `죽음을 아직 인지 하지 못한 상태 → 불안한 심리 상태 → 부모의 죽음 인지 → 잠시간의 공황기 → 부모의 애상`이란 실비아의 행동구조는 `단절상태 → 접촉의 시도 → 접촉대상의 상실 → 해방감 → 흔들기 의식`으로의 구조로 연결된다. 이 모든것은 부모의 죽음으로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고 있던 실비아에게 자신의 젖니가 담긴 병을 발견함으로써 흔들기 의식의 완성으로 귀결된다. 실비아가 자신의 젖니가 든 유리병을 발견하고 취하게 되는 흔들기 의식의 태도는 우리에게 그저그런 감상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인간존재로써의 삶의 구심점을 비쳐주고 있다는데에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죽음`은 어둡고 침울,우울하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이 책의 작가가 흔들기의식을 그저 죽은 이들만 추모하자는 뜻에서 내세운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삶은 곧 죽음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태어나면서 곧 예정된 죽음의 행로.우리는 그 고독한 행로를 걸어야 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흔들기 의식`은 그저 죽은 사람의 추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써 곧 죽음으로 이르는 자기자신의 내면의식에 흔들기를 행함으로써 보다 긍적적이고 희망적인 삶, 곧 죽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우리가 실비아의 마지막 태도에서 죽음의 안타까움보다는 자기자신의 내면승격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