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사랑하라 - 20세기 유럽, 야만의 기록
피터 마쓰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인간의 야만성

워싱턴 포스트인 보스니아 특파원이었던 피터 마쓰가 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 속에 숨어있는 잔혹한 ‘야수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보스니아에서 저자는 선한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 행위를 행하거나 그것을 묵인할 있는지, 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넘어가는지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만큼 네 이웃을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보스니아에선 지금도 태어나면 크로아티아냐 세르비아냐 민족을 선택하도록 하는데, 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들은 민족 대신 종교를 선택한다. 게다가 보스니아의 통혼율은 24%에 이르고 수도인 사라예보의 경우 32%에 이른다고 한다. 보스니아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그들에게 왜 20세기에 가장 추악한 전쟁이라고 꼽히는 보스니아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보스니아 사람들은 전쟁의 원인을 정치꾼들의 선동과 대중의 부화뇌동에서 찾는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대세르비아주의를 들고 나와 정권을 잡은 뒤, 세르비아계를 선동해 보스니아에서 학살극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선동가들로 인해 나치 시대에나 볼 수 있었던 아니 그보다 더 잔혹했던 ‘죽음의 수용소’에서 보스니아의 무고한 무슬림들이 수없이 죽어나갔고 세르비아 군인들에 의해 강간은 일상생활처럼 일어났다.

과연 선동가들만의 잘못일까? 세르비아인들은 군입대 명령을 받으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감옥에 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군대에 간다고 말한다. 도망가면 가족이 몰살당하기 때문에 선택이 여지가 없다고 한다. 서유럽 국가와 미국 등 강대국들과 유엔은 그것이 자국민끼리의 전쟁이라는 이유로 관망하는 자세를 유지했으며 세르비아의 공습에 고통 받고 있는 보스니아에 대한 무기금수조처를 해제하지 않았다. 심지어 보스니아가 석유가 나오는 나라였다면, 미국은 당장 도와줬을 것이라는 말도 흘러나왔다.  

이렇듯, 인간의 숨겨진 ‘야만성’으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야만 했다.
인간의 ‘야만성’으로 인한 이 잔혹한 보스니아 전쟁은 남의 일만은 아니다. 특히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을 가졌기에 더욱 더 그러하다. 6.25 전쟁도 보스니아 내전도 지금의 한국처럼 평화로운 시기에 일어난 일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저기 어딘가에 야수가 숨어 있으며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이제 더 이상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당신이 군입대 명령을 받은 세르비아인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인공인 진태(장동건)가 보여줬던 ‘야만성’이 나에게도 있진 않을까? 이처럼 많은 생각을 해주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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