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인, 강도, 강간, 마약, 절도, 폭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던 비행청소년 알렉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온갖 악행과 탈선을 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혼자 감옥에 갇힌다.
감옥 안에서 루도비코 실험에 참여하면 빨리 석방될 수 있다는 것에 혹해 그 실험에 자청하여 나선다.
루도비코 실험은 온갖 잔인한 폭력에 강제로 노출시켜 폭력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
그 안에서 몇 주의 실험과정을 겪은 알렉스는 폭력성을 완전히 거세당한채로 세상에 나온다.
완전히 무기력해진 그는 세상에 던져져 자신이 이전에 저질렀던 만행에 복수당하지만
그에 저항할 수 있는 폭력성조차 이미 남아있지 않았기에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한다.
정치적 사상가들은 그런 그를 공권력의 희생자라 여기며 도와주다가 그를 이용해 정치적 쇼를 선보인다.

그리고 그 쇼를 보인 덕에 그는 다시금 교화되고,
자신의 본성을 되찾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전의 그가 아니다.
그는 마약 탄 우유보다는 우유를 탄 차를 마시고 싶어졌고
따뜻한 가정과 사랑스런 아내, 자식을 꿈꾸게 된 것이다.

앤서니 버지스는 사회의 공권력으로 행하는 강제적 교화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묻는다.

그렇게 한 인간 속에 내재되어있는 자유의지(폭력성)를 강제로 억눌러 버릴 수 있는 것인지를..

국가의 권력을 대표하는 정부가 루도비코 요법을 권장하는 이유는 짧은 시간 안에 세뇌를 통해 범죄자들을 개조한 후에 교도소에서 방출하고, 남은 공간에는 사상범들을 수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이 소설을 통해서 버지스는 국가권력이 구성원들에게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태엽 장치를 달아서 통제하려는 음모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버지스가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이면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경험한 권력의 폭력에 대한 거부감이 저변에 자리하고 있다. 동시에 여기에는 조지 오웰이라는 1940년대 문학적 우상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버지스는 당시에 오웰이 체스를 두던 클럽을 찾아가서 그를 만나기도 하고, 그의 '동물농장'을 읽기도 했다. 버지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1940년대를 오웰이 주장한 바처럼 전체주의적인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버지스가 단순히 폭력과 범죄 행위를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십 대 문화'에 대한 그의 비판적 관찰에서도 드러난다.
시계태엽 오렌지 작품해설 중-


시계태엽이 돌아가듯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 작동할 수 있는 태엽 같은 인간상.
어떻게 굴러갈 것인지 알 수 없고 때로 주변에 부딪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이미 돌려진 태엽 같은 청춘.
어떻게 보면 주인공 알렉스는 한 번도 자기 의지대로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청소년기에는 친구들에 같이 휩쓸려 악행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가서는 갇혀 있는 삶을 살고,
루도비코 실험에서는 강제적인 사회화를 당하며,
마지막에서도 그는 정치범들의 희생양이 되어 원점으로 돌아온다.
루도비코에 의해 교화되었다가 다시 재 교화된 그가 진짜 그였을까?
끝에서 알렉스는 단지 철이 들었을 뿐인걸까.


내가 살고 있는 삶이 과연 내 삶이었을까.. 하는 것.
과연 그것이 온전히 나의 선택뿐이었을까 하는 의문.
나는 책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

이런 괜찮은 책이 스탠리 큐브릭 영화의 원작으로만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는 것도 씁쓸하고 안타깝다.
(난 아직 영화를 안본 상태기 때문에 영화가 얼마나 좋은 지는 모른다;
근데 대개 영화 먼저 보고 책 본 사람들은 영화의 잔상이 꽤 오래간다고 하기에..
특히 말콤 맥도웰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고.. 게다가 민음사에서 나온 책은 표지가 영화표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고와 디디에게 기억되지 못하는 일상은 되풀이되며, 그들은 오늘은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삶을 산다. 그 와 중에서 그들에게 가장 확실하고 절대적인 것은 고도이다. 혹은 고도를 기다리는 자기 자신이다. 그들은 계속  고도를 기다린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언제 오는지도 모르는 채로. 고도라는 이상향은 때때로 그들을 위협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을 지워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위안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나누는 무의미한 그들의 말과 행동들. 그들을 스쳐가는 행인들의 말과 행동들. 그것은 자체로도 웃음의 요소를 갖고있지만, 그 안에는 분명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과 공허가 담겨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연극을 보면서도 결코 마음이 편안할 수 없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공포였기에. 살면서 자기에게 불안을 느끼지 않는,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언젠가 고도를 만나겠지.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잖아.

아직도 어느 시골 길의 나무 밑에선 고고와 디디가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