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현재 길을 잃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스스로를 고독하다고 말하지 않는 고독한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이 책을 다 읽은 내가, 아직 '그 병풍'과 '그 마을'을 떠나지 못한 나에게 추천한다.

 

나는 이 소설들이 마음에 든다.

 

달에 울다 &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 - 두 편의 소설이 담긴 [달에 울다]

 

 

언제나 그렇듯이 책의 저자가 저명하고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면 그의 책을 읽기도 전에 호감도가 상승한다. 혹시 난해한 내용이어서 이해를 못 한다면 그것은 얇은 지식만 가진 나의 잘못일 뿐 작품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수상자의 책을 읽을 기회가 온다면 망설이지 말고 잡아야 한다. 그 기회를 놓친다면 나는 언젠가는 읽겠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칠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가를 꿈꾸지도 않았고 그전에 습작을 해본 경험도 없이 처음으로 쓴 소설 [여름의 흐름]으로 문학계 신인문학상을 타고 일본 문학계의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그는 천재인가보다.

 

문학계문학상 · 아쿠타가와상 수상

일본 현대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 마루야마 겐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고독을 그린 수작

>>> 책의 띠지 중에서

 

'스승도 친구도 예비지식도 없이 오로지 작품 한 편으로 문학세계에 뛰어들었다.'

23세에 최연소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을 당시 그가 영향을 받은 책이라고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백경(Moby Dick)』이 전부였다.

>>> page 270 옮긴이의 말 중에서

 

시와 소설의 중간인 시소설(詩小說). 이라는 책 소개를 보고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거지??? 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자가 가득한 일본판 그리스 희극이나 중세 유럽의 음유시인들의 노랫말 같은 소설이라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다가 결국엔 지쳐서 외국어 공부를 하듯이 글자와 글자를 읽다 책이 어서 끝나기 만을 바랄 것이다.

게다가 책의 뒤표지에 쓰여진 대로 하나의 소설에 시의 함축성과 소설의 서사성이 공존한다면 내용은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아니다. 내가 틀렸다.

시소설에 인한 어려움은 없었다. 그 형식은 그의 소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을 뿐이다. 저자는 내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서는 나의 어쭙잖은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고 사과할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시소설집으로 발간하였고 [달에 울다]와 [조롱을 높이 매달고]를 실었다.

 

 

 

[달에 울다]는 딱 '시소설'에 어울리는 소설이다.

단락들이 여백으로 나누어진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이어져야만 하지만 하나의 단락을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어색하지 않다. 앞뒤의 내용이 없는 채로도 나쁘지 않다는 것. 그 자체로 시다. 시들을 모아 소설이 된다.


 

주인공이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자신의 이부자리 옆 '병풍'을 묘사하는 부분이 특히 시적이다. 

병풍 속의 거지 법사는 주인공과 함께 그 세월들을 살아간다. 비파의 소리가 때로는 음악으로 때로는 절규로 바뀌며 주인공의 상상에 몸을 맡긴다. 그 병풍 속의 세상은 벗어나고 싶은 현실 넘어의 곳이고 주인공의 마음을 형상화해주는 멋진 작품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보면 사계절의 이야기다. 주인공이 살아내며 느끼는 인생의 사계절. 주인공의 이야기인 동시에 마을의 이야기다.

인생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사과밭의 이야기.

하나의 계절은 10년을 간직한다. 봄에는 10살, 여름에는 20살, 가을에는 30살, 겨울에는 40살 현재.

그래서 눈이 많이 내린 추운 겨울에서야 이야기가 끝이 난다.

 

주인공이 거지 법사를 바라보며 잠드는 그 수많은 세월 동안 사람들은 죽거나 살아간다. 마을은 변했지만 주인공은 변하지 않았다. 주인공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들어있는 병풍이 함께 한다. 그곳엔 죽은 백구도 있다.




 

[달에 울다]가 병풍과 함께라면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피리새와 함께다.

피리새는 주인공에게 위로이자 희망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피리새를 가질 수 없었다.

과거의 마을로 돌아간 주인공. 살기 위해 갔지만 그곳은 그가 놓지 못한 과거일 뿐이다. 그렇게 검둥이도 그곳에 묻었다.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단락의 여백이 없다. 보통의 단편 소설처럼 보인다.

시소설집에 단 2개의 소설뿐인데. 이 책의 절반 이상이 이 소설인데 말이다. 시소설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 단락의 여백이나 글의 길이만을 보고 시소설이네 아니네를 말하다니 저자의 호통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K시와 M마을, 세 명의 무사와 그들이 타고 있는 말의 발자국, 말이 달리는 소리와 피리새가 지저귀는 소리, 바닷가의 풍경과 버려진 작은 노천온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나와 또 다른 나, 빨간 하이힐과 노인 등등 소설을 읽고 나면 저 단어들이 가지는 의미는 굉장하다. 읽을 때는 소설이고 떠올리면 시다.

 

아주 한정된 장소고 아주 소수의 사람만 있지만 절망적인 주인공의 발버둥과 그 마을이 뒤엉켜 지루할 틈이 없고 조금 무서웠다.

밤에 책을 읽을 때 내 주변 공기에 오싹함을 느꼈는데 책을 읽다가 잠이 들자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무서운 꿈을 꾸었었다.

나는 주인공을 이해한다. 주인공이 불쌍하지도 않고 위로나 응원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무서웠나.

 

두 소설 속의 사람들은 슬프고 비참하며 무서울 정도로 담담하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간다.

내가 몇 안 되는 일본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기괴하면서 침착하고 건조한 느낌 그대로다.

영화 '링'을 봤을 때의 그 느낌도 살짝 난다.

 

검색해보면 나오는 그런 자세한 줄거리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줄거리를 모른 채 읽는 것이 좋을 거다. 간략한 줄거리라도 알게 되면 이야기는 조금 시시해질 테니.

 

 

** 이 책은 1986년 출간되었다. 확실히 소설 안에서 몇 십 년 전의 냄새가 난다.

 

** 노인이 되면 근사한 병풍을 사서 이부자리 옆에 두어야겠다.

 

** 고독한 인간에게는 늘 사람보다 믿고 의지하던 개의 죽음이 붙어있다. 여건이 된다면 유기견을 키우고 싶다. 나도 고독한 인간이니까 개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속셈이다.

 

 

 

 

※ 위의 글은 도서리뷰단에 선정되어 해당 출판사가 무상으로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개인적인 소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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