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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 지음, 임희선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남쪽으로 튀어』라는 책의 요란한 광고 속 “세금 따위는 절대 못 내!”하는 식의 외침이 마음에 들어서 오쿠다 히데오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어찌나 배꼽 잡게 웃겼던지 자연스럽게 『인더풀』과 『공중그네』를 읽고 그 다음 손에 든 것이 바로 이 『GIRL』이다. 그런데 느낌이 다르다! 훨씬 더 가벼워진 것 같으면서도 한층 더 예리한 감각이 살아있는 듯해서 깜짝 놀랐다. 30대 여성들의 심리를 어떻게나 잘 콕콕 찍어대는지 읽으면서 찔리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일단 『GIRL』이라는 제목부터가 그러하다. 처음 이 제목을 보고 떠올린 것은,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풋풋한 10대 철없는 소녀들이었다. 그런데 웬걸! 그것은 여전히 소녀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핑크 공주 30대, 여전히 철없는 소녀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물론 이 책 속의 소녀들은 직장과 일 때문에 결혼이 늦어진 일본의 직장 여성들이지만, 어찌 보면 한국의 직장 문화와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다고 느껴졌다. 아무래도 일본적이라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직장 여성들의 고민과 관심사 등은 크게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띠동갑」의 요코는 서른 네 살이고 입사 13년차의 베테랑이다. 어느 날, 한 남자신입사원의 지도사원[신입사원의 회사 적응을 위해 개인지도해 주는 사원]이 된다. 그런데 그 신입사원인 와다 신타로는 스물 두 살의 그야말로 킹카이다. 신타로는 키 크고 잘생긴 외모이면서도 거만하다거나 하는 구석이 전혀 없이 예의바르고 순진한 그야말로 완벽한 남성이다. 신타로를 노리는 많은 여직원들 사이에서 요코는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끼면서 스스로도 점점 유치해져가는 자기를 느낀다.
그녀는 아무래도 또래의 남자들을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미팅에 나간다. 미팅에 참석한 30대 후반의 남자들은 세련되고 여유있고 모두들 깔끔하지만 그래도 뭔지 모를 아쉬움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그야말로 ‘설레는 만남’이라기보다는 자신들과 비슷한 동족이 많다는 것에 위안을 느끼게 하는 ‘그저 그런 만남’이기 때문이다. 신타로와 다른 부서의 섹시한 여직원 가호리를 오해하고 미행 비슷한 것을 하다가 스스로가 무척 부끄러워진 요코는 결국 자신의 분수를 깨닫게 된다는 결말이지만, 그 결말이 매우 유쾌하고 따뜻하면서도 익살스럽게 그려져서 ‘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이야기들도 대체로 비슷한 구성이라 할 수 있는데, 결혼과 직장 중 일을 선택한 여성들의 고민이 주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일에서는 인정받았지만 그래도 뭔가 여전히 허전한 여성들은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패션에 집착하거나, 멋진 아파트에 집착하거나 프로젝트의 성과를 올리고 직장에서 인정받는 것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젊은 여성들에게 질투심을 느끼기도 하고, 주부가 된 동창의 수수한 모습이 한없이 부러워 보이기도 하는 그런 여자들의 쓸쓸함 같은 것을 잘 포착해냈다는 점이 오쿠다 히데오의 예리함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30대 여성이 아니라면 조금 공감하기 힘든 것이겠지만 말이다.
앞의 소설들과 다르게 마지막에 실린「워킹맘」은 이혼 후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직장 여성의 고충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역시 일하는 여성의 고민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른 내용은 아니다. 일도 최고, 엄마로도 최고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히라이 다카코의 모습을 보면서 여성에게는 둘 중 어느 것 하나도 녹록치 않구나 싶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엄마 되기를 포기한다는 점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일 터이다. 이것이 출산율 저하로 이어지고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을 불가피하게 한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이런 점이 골칫거리라고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아무래도 아직은 한국보다는 일본이 「워킹맘」에서처럼 직장 여성의 고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 같다.
예를 들면 일본 IBM을 비롯하여 많은 기업들이 ‘단시간 근무제도’를 도입해서, 근무방식을 유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한다. 단시간 근무를 적용받게 되면 3일 근무, 4일 근무, 5일제 노동의 60%근무 등 노동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의 임신, 출산, 육아 등이 용이해진다. 이것은 제도를 통해 실직의 두려움으로 임신을 기피하는 현상 등을 막을 수 있고, 여성 인재를 발굴·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와 회사 모두에 긍정적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제도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런 인식은 부족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 사회의 남다른 분위기가 있었기에 오쿠다 히데오는 직장 여성의 문제를 유쾌하면서도 당당하게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