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 성격 급한 뉴요커, 고대 철학의 지혜를 만나다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석기용 옮김 / 든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0. 번역과 편집 (편집으로 인해 별 -1)


철학이론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실적이다.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내용이지만 얄팍하지 않다. 아주 잘 읽히고 번역이 대단히 훌륭하다. 대중철학서라도 비전공자가 번역하면 이상한 구절이 많이 눈에 띄는데, 역자 소개를 보니 전공자의 번역이라 그런지 흠잡을데가 없고, 우리말 문장도 아주 좋다. 금세 읽힌다. 


그런데 편집이 개판이다. 우선 글씨가 두껍고(인용구의 글씨는 오히려 얇다) 이로 인해 눈이 피곤하다. 게다가 들여쓰기가 없다. 아, 독자보고 책을 천천히 읽으라는 건가. 어디서 문단이 시작하는지 헷갈리게 만들어서.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부디 세로쓰기로 내어주고 띄어쓰기를 생략해달라.


제목도 이상하다. 어떻게든 구매자의 흥미를 붙잡아보려고 안달한 것이 너무 노골적이다.원제는 "how to be a stoic : using ancient philoshphy to live a modern life"로, 정확히 책 내용을 표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말 제목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는, 작가가 어떠어떠한 계기로 인해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는 인상을 풍기는데, 이 책에서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관련된 내용은 모두 스토아주의를 풀어내기 위한 일례들이지, 자신이 스토아주의자가 된 계기와는 관련이 없다. 차라리, '스토아 주의자가 되려면'이 적당할지도 모르겠다(물론 매력없는 제목이긴 하지만 적어도 잘못된 제목은 아니다)


부제는 '성격 급한 뉴요커, 고대 철학의 지혜를 만나다'이다. 그런데 저자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이탈리아 출신이고 유년기를 로마에서 보냈다. 뉴욕시립대 교수이니까 뉴요커인것은 알겠다. 그러면 한국 이민자가 뉴욕으로 이민가서 자수성가한 이야기도 '부지런한 뉴요커, 우뚝서다' 뭐 이렇게 부제를 정할 것인가. 또한 저자가 딱히 성격이 급한 것 같지도 않다. 짜증나는 상황에서 맞서 다투는 일화가 좀 있기는 한데, 그냥 보통 성격의 사람들이 행동하는 수준이고, 이러한 성격과 스토아주의를 연구하게 된 연결점은 없다.  


책도 더 얇게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단의 여백은 왜 만들어두었는지 모르겠다.상단의 바코드 같은 것은 왜 찍혀있는지 더더욱 모르겠다. 원저자가 알면 뭐라할까. 그가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 있다면 진정으로 훌륭한 스토아주의자임에 틀림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멍청한 일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옛날 얘기를 현대에 듣는 것. 지구가 네모라거나 달에 토끼가 산다는 이야기들은 허구이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나 내가 이를 기초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낭떨어지로 추락할까봐 지구 반대편 여행을 꺼리는 것도 아니고, 달토끼에게 떡을 빌지도 않는다. 단지 이야기로서의 재미에 그친다. 


오래된 철학이론은 그 처지가 다른가. 이제는 의심을 사고 있는 전제들, 가령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거나, 신이 존재하고 인간을 특별하게 창조하였다는 등의 전제에 기대고 있는 철학은, 그 전제가 깨어지면 전부가 의심스러운 사상체계, 잘 봐주어야 흥미로운 옛날 얘기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옛날 사상인 스토아주의가 이러한 처지를 벗어나려면, 그 전제들이 현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거나, 그 전제를 생략하더라도 사상체계에 큰 결함이 없음을 우선 보여야 할 것이다.  스토아주의는 인간의 특별함과, 신의 존재에 대한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


저자는 돈키호테처럼 구시대의 전제를 고수하지 않고, 스토아주의에 필요한 전제들이 현재에도 유효할 수 있는 해석을 제시한다. 인간만이 특별하게 창조되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이 속한 호모사피엔스 종이 타 종과 크게 차이나는 특징이 있고, 우리 종 안에서의 유사성은 다른 종과의 차이점과 비교하면 현격하다. 우리 종의 대표적인 유사점은 합리성과 사회성이다. 그리고 스토아주의들이 강조한 것도 바로 이 특성이다. 즉, 호모사피엔스종이 스토아주의가 중시한 합리성과 사회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종과 큰 차이를 보인다는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인간은 특별하다는 구시대의 전제가 현대에도 유효하게 해석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신(=고대의 로고스)에 대해서도 스토아주의의 신이 유일신 종교에서 내세우는 인격신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 혹은 아인슈타인의 신 등으로 해석될 수 있고, 스토아주의가 여러 신 관념에 개방적이었거나, 심지어 그 문제를 따지지 말자는 스토아주의자도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흄(창조론이 즐겨 내세우는 설계논변인 시계공 유비를 무너뜨렸다)과 다윈(창조론 없이도 복잡한 세계를 설명해 주었다)이후에도 얼마든지 스토아주의를 유의미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된 사상을 현대에 되살리는 이 복원작업이 없었다면, 정작 본격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아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정도로 그쳤을 것이고 흥미가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마음에 들었던 것. 저자는 신무신론자들(단지 무신론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신론이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는데, 나도 가끔 불편함을 느꼈다. 사실 리차드 도킨스 책을 읽으면 그 압도적인 논변과 숨쉴틈없는 문장들에 기가 죽는다. 그러나 윤리적인 삶을 실천하기 위해 종교적인 교리를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도 분명 많고, 이들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사람(혹은 종교덕분에 윤리적인 사람)이 단지 독실하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뭔가 옳지 않은 것이다. 어디선가, '과학자가 주중에는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 교회를 가는 것에 대해 스스로 모순적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취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너가 뭔 상관이냐'는 반발심이 바로 든다(나는 과학과도 거리가 멀고,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로 여기고 있음에도 그렇다). 그리고 에픽테투스는 정확히 그렇게 말한다. 


‘이 사람아, 대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당신이 뭐기에 내게 이러는 거요?’ 더 졸라대다가는 그가 당신 코에 한 방 먹이기 십상입니다. 나 자신이 한때 이런 종류의 대화에 열심이었지요. 그러다가 바로 그런 대접을 받게 되었고요.’


2. 


책은 스토아주의의 규율인 욕망, 행위, 승인에 맞추어져 쓰여 있다. 


욕망은, 무엇이 원할 만한 것이고 무엇이 아닌 것인지 구분하는 것이다. 행위는, 무엇이 적절한 행동이 아닌지 말해주고, 실제로 악행을 행하는 것이 단지 무지의 산물에 불과함을 강조한다. 승인은, 삶에서 어떤 상황에 대한 인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지의 문제로, 죽음, 외로움, 불안 등의 심리를 다룬다. 


이 중 욕망 부분이 가장 흥미롭고, 아래에 짧게 소개해본다. 



3. 1. 통제의 이분법 -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기


에픽테투스왈, 

“우리는 항해에 나선 사람들과 아주 비슷하게 행동하지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키잡이, 선원, 그 날,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때 폭풍이 일어납니다. 내가 무엇을 걱정해야 할까요? 나는 내 임무를 다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키잡이입니다. 만약 기상이 항해하기에 좋지 않다면, 우리는 괴로운 마음으로 모여 앉아 계속 서로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어떤 바람이 불고 있지?’ ‘북풍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언제 서풍이 불어오겠나?’ 그게 그리하기로 결정할 때겠지요, 나리.”

이 구절이 마음에 와닿는다. 요즘 하루에도 몇번씩 떠올린다. 마음이 급한데 내 앞에서 신호가 끊길 때, 편안하게 운전석에 허리를 파묻고 묻는다. 신호가 언제 바뀌겠는가. 옆자리에서 에픽테투스가 절름거리는 쪽 다리를 쓰다듬으며 답한다. 그게 그리하기로 결정할 때겠지요, 나리. 처음에는 한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끄덕이게 된다.    


항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숙련된 선원을 선정하는 것은 내 통제 범위 안에 있다. 내가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그런데 바람이 불지 않으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다. 바람을 불어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함을 욕구하고, 달성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해야 하는가. 그러지 말라.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과녁의 실제 명중은 결심은 하되 욕구될 일은 아니다."  이러한 구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하되,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에픽테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세요. 그리고 나머지는 그 일이 벌어지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어떤 일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어떤 일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견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충동들, 욕망들, 반감들, 간단히 말해 우리 자신의 행함인 것들이면 무엇이건 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유물도 그렇고 우리의 평판이나 공직도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자신의 행함이 아닌 것이면 무엇이든 다 그렇습니다.”


3. 2. 그런데 이것은 체념 혹은 무관심이 아닌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항해하는 것에 관심을 끊거나 일단 잊고 있으라는게 아닌가하고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이다. 약간 미묘하지만, 이러한 통제의 이분법을 받아들이는 것 =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욕구하지 말라는 것(욕구할 없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는 것)의 이면은 바로, 통제가능한 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실제 스토아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지 보라. 에픽테투스는 주인에게 심한 매질을 당해서 절름발이가 된 노예였는데 후에 교육을 받고, 자유인이 되었고, 선생이 되었고, 황제도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러 왔다. 세네카는 정치가이자 웅변가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였다. 그들은 체념한 자, 회의주의자들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을 깨닫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인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을 수 있다(전쟁, 사형, 추방, 질병이 현대보다 더 만연했던 당시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로부터 귀결되는 결론은 이것이다. 중요한 것은 힉 에트 눈크hic et nunc. 여기 그리고 지금.  


에픽테투스는 이렇게 말한다.


"... 즉 누군가가 가져갈 수 없는 것 말고 물 주전자나 수정잔 같은 것에 집착할 때, 그대는 그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깨졌을 때 동요해선 안 됨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만일 그대가 자녀에게나 형제에게나 친구에게 입맞춤을 한다면…… 그대는 지금 죽을 운명의 존재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대가 사랑하는 그 어떤 것도 그대의 것이 아님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대에게 잠시 주어진 것이며, 제철에 나는 무화과나 포도송이가 그렇듯 영원히 주어진 것도 헤어질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아들이나 친구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갈망한다면, 한겨울에 무화과를 갈망하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3. 3. 이로 인해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을 받아들이면,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달하지 않게 된다. 저자가 제시한 일화는 네로에게 추방당한 스토아주의자 파코니우스 아그리피누스에 대한 것이다.


 “그에게 전갈이 왔습니다. ‘지금 원로원에서 당신 재판이 진행 중이오!’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군, 그런데5시가 되었네 그려.’ 이 시간은 그가 운동을 하고 냉수 목욕을 하곤 하던 시간이었습니다. ‘나가서 운동이나 하세나.’ 운동을 마치고 났을 때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말했습니다. ‘유죄 평결이 내려졌습니다.’ ‘추방인가 사형인가?’ 그가 물었습니다. ‘추방입니다.’ ‘그럼 내 재산은?’ ‘그건 몰수되지 않습니다.’ ‘잘됐군, 그럼 아리치아로 가서 저녁이나 하세나.’


아, 쿨하다. 이정도면 하드보일드 뒷골목 탐정도 울고가겠다. 그 탐정이 깡패들에게 둘러싸여서 실컫 얻어터진다. 그러나 여전히 고분고분하지 않다. 깡패 두목이 말한다. 자네 태도가 마음에 안들어. 그 탐정이 말한다. 하루 일당이 이십만원인데 거기에 태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거든. 몇 대 더 얻어맞는다. 자네 정체가 뭐야. 스토아주의자. 제기랄, 그게 뭔지 아리치아에서 한잔 하면서 들어보자고. 그럴거라면 하루치 일당은 받아야겠는데.      



3. 4. 선호할 만한 무관심의 대상


물질적인 것들을 다루는 것은 중요하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쾌락주의자들이 아니지만 금욕주의자들도 아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선호할 만한 무관심의 대상"은 물질적인 것, 세속적인 것을 다루는 아주 현실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이다. 


부유함은 우리가 선호하고, 가난함은 우리가 선호하지 않는다. 고통은 우리가 선호하지 않고, 쾌락은 선호한다. 재산의 다소나 쾌락의 정도는 그러니까 우리가 선호/불호하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덕, 가령 지혜이다. 에픽테투스는 소크라테스를 예로 들면서, 공놀이를 즐기되 공에는 무관심하여야 한다고 한다. 


에픽테토스왈, 


“[소크라테스는] 공놀이를 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갖고 놀던 공은 무엇이었을까요? 인생, 투옥, 망명, 독약 마시기, 아내 잃기,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기. 이런 것들이 그가 갖고 놀던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균형을 지키며 공 던지기 놀이를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소위 가능한 모든 세심함과 온갖 재주를 기울여 놀이를 즐기되 그 공 자체는 무관심한 대상인 것처럼 다루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태어난 시대에서 훌륭한 삶을 살고자 했고, 군인이자 선생이 되었고, 목숨과 바꿔가며 도덕적 의무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는 고결하게 죽었고, 자신의 안위, 친구나 가족을 위해 고결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결성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무관심하다. 무신경하다는 것이 아니다. 고결함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것(=선호/불호의 대상)을 지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고결함을 훼손하는 문제, 덕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안위, 재산,가족, 우정은 모두 '선호할 만한 것'이다. 이를 즐기되, 그러나 무관심한 대상인 것처럼 다루어야 한다. 즉, 덕을 함양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에 비추어보아서, 그 이외의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시의 견유학파에서는 덕 이외의 것을 깡그리 부정했다. 디오게네스는 철저히 금욕을 중시했고(선호할 만한 무관심의 대상이 덕 함양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배변과 성교를 했다. 그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건강, 재산, 교육, 외모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했다(정말 솔직한 태도이지만 갖지 못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선호할 만한 무관심의 대상"이 위치하는 곳은 이들 양자 사이이다.   


현대 경제학자들의 표현대로라면, 사전식 선호를 여기에 가져다 붙일 수 있다. 범주A에 속하는 물건들1과2의 값을 매기고 범주B에 속하는 물건들3, 4, 5에도 값을 매기고 비교 할 수 있으나, 범주를 가로지르는 거래는 이루어질 수 없다. 가령 1과 4를, 아무리 4가 많더라도 교환할 수 없다.(이걸 왜 사전식 선호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A로 시작하는 단어와 B로 시작하는 단어는 반드시 구분되지만 A안에서나 B안에서는 좀 섞어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한걸까;;) 덕의 추구는 범주A에 속하고 선호할 만한 무관심의 대상들은 범주B에 속한다. 현실적인 쾌락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덕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이다. 세네카의 표현대로 하면 이렇다.


‘기쁨과 고통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선택을 요청한다면 나는 전자를 추구하고 후자를 피할 것이다. 전자는 자연에 따르는 것이요, 후자는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그것들을 평가하는 한, 그것들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나 수반되는 덕의 문제로 보자면, 기쁨을 통해서 도달하는 덕이든 슬픔을 통해 도달한 덕이든 각각의 경우마다 그 덕은 동일한 것이다.’



4. 아래는 인상적인 인용구들


소크라테스:

“결코 …… [너의] 나라를 묻는 사람에게 ‘나는 아테네 사람이오.’ 혹은 ‘나는 코린토스 사람이오.’라고 대답하지 말라. 대신 ‘나는 우주의 시민이오.’라고 대답하라.”


에픽테토스:

(어느 날 제자 한 명이 찾아와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에 불만을 터뜨리면서 “그러면 저는 이제 절름발이가 되고야 마는 것인가요?”라고 말했다). “노예여, 그대는 그 비참한 한쪽 다리 때문에 우주를 책망할 참입니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상에는 치명적인 필연성과 무적의 질서가 존재하거나, 아니면 자애로운 섭리가 존재하거나, 아니면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는 혼란이 존재할 것이다. 만약 무적의 필연성이 존재한다면, 그대는 왜 저항하려 하는가? 만약 속죄를 허용하는 섭리가 존재한다면, 네 자신이 신의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라. 만약 지배자가 없는 혼란이 존재한다면, 그런 폭풍우 속에서 그대 자신이 다소간 통제의 지성을 갖추었음에 만족하라.”


에픽테토스:

"키잡이가 자신의 배를 난파시킬 요량이라면 그 배를 구해낼 때 필요한 것과 똑같은 재주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가 배를 돌린다 해도 풍랑 속으로 너무 멀리 나간 것이라면, 그는 길을 잃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 다만 주의의 결핍 때문이라 해도 역시 똑같이 그는 길을 잃을 것입니다. 인생도 완전히 똑같습니다. 만약 그대가 아주 잠깐이라도 꾸벅꾸벅 존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그대를 떠날 것입니다. 늘 깨어 있으면서 그대가 받은 인상들을 감시하십시오. 그대가 계속 간직할 것들은 사소한 것들이 아닙니다. 자기 존중, 명예, 성실성, 침착한 정신, 미혹이나 두려움이나 선동에 흔들리지 않기.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자유입니다. 이 모든 것을 뭘 위해 팔아치울 것인가요? 구매할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십시오."


에픽테토스:

"절뚝거림은 다리의 장애지 의지의 장애가 아닙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관련해 스스로에게 그리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대는 그것이 다른 무언가의 장애지만 그대 본인에게는 진짜 장애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픽테토스:

(그러니까 어쨌든 죽음의 시간은 다가오게 되는 것 아니냐고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 ‘죽다’라는 말로 그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요?” 에픽테토스가 나를 교정해주었다. “번지르르한 단어들을 사용하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해보세요. 지금이 그대의 물질적인 부분을 원래의 원소들로 복원시킬 시간이라 합시다. 여기에 두려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것이 우주가 어떤 손실을 입었음을 의미하나요, 어떤 이상하거나 불합리한 사건이라도 벌어진 것일까요?” 


에픽테토스:

“기억하세요, 맞거나 모욕당하는 것만으로는 해를 입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요, 해를 입으려면 지금 그대가 해를 입고 있다고 믿어야만 하는 겁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대를 도발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대의 마음이 그런 도발의 공모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인상들에 충동적으로 반응하면 안 되는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반응을 드러내기 전에 잠깐 시간을 가지세요. 그러면 통제력을 건사하기 더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에픽테토스:

“누군가가 그대에게 악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런 소문들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대신에 이렇게 응수하십시오. ‘맞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야기의 절반은 모르는 모양이군요. 더 많이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


에픽테토스:

“대화 중에 지나치게 길게 자신의 업적이나 모험에 관해 논하지 마세요. 단지 그 이유는 그대가 자기 위업을 상세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해도 그것이 곧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은 기쁨을 얻게 되는 걸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에픽테토스:

“어떤 사람은 서둘러서 씻습니다. 그가 제대로 안 씻었다고 말하지 말고 서둘러서 씻었다고 말하세요. 어떤 이는 포도주를 많이 마십니다. 그가 안 좋게 술을 마신다고 말하지 말고, 많이 마신다고 말하세요. 그들의 사정을 알기 전까지 그들의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그것이 분명히 이것을 알아들어 놓고는 저것에 동의하게 되는 처사로부터 그대를 구원해줄 것입니다.”



세네카:

정신은 매일 검사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하루를 끝내고 휴식을 위해 발걸음을 내딛을 때, 자신의 정신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 섹스티우스의 관례였다. “너의 나쁜 습관들 중에 오늘 치유한 것은 무엇인가? 어떤 악행을 막아냈는가? 너는 어떤 측면에서 더 나아졌는가?” 만약 자신이 매일 법정에 출석해야 하리란 것을 안다면 분노는 그치고 더 온화해질 것이다. 그날 벌어진 일들 전체를 이런 식으로 검토하는 것보다 무엇이 더 훌륭한 일일 수 있겠는가? 스스로 이렇게 검사를 마친 후에 찾아오는 잠이라면 얼마나 달콤할 것인가? 우리의 정신이 칭찬이나 질책을 받고 났을 때, 우리의 비밀 심사관과 검열관이 우리의 품행을 보고하고 났을 때, 그 잠은 얼마나 평온하고 건전하고 속이 편하던가? 나는 내 이런 특권을 이용해 매일 내 자신 앞에서 나의 대의를 변론한다. 등잔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내 버릇을 아는 아내가 말을 멈출 때, 나는 그날 하루 전체를 내 앞에 펼쳐 놓고 차례차례 생각하며 내가 한 말이나 행동 전부를 반복해본다. 나는 내 자신에게 어떤 것도 감추지 않으며, 어떤 것도 생략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권한이 내게 있는데 어째서 내가 내 결점을 그게 무엇이든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이번엔 너를 용서하노라. 그러니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라.” 



5. 소감


일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은 손에 잡아본 적이 있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꽤나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세네카도 약간 읽은 적이 있다. 멋진 말들을 여기저기서 주워들어서 - 특히 시간과 죽음에 대해서 - 흥미가 갔었다. 이들이 스토아주의자들이라는 것은 풍문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들이 남긴 경구가 스토아주의의 표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약간 이해가 갔다. 그때그때의 멋진 표현에 그친 것이 아니라, 통찰을 갖춘 철학적 식견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은 뒤 나 자신도 조금 돌아볼 수 있었다. 내 일의 성패 중 상당 부분은 나에게 달려있지 않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도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누군가 나를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이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딱히 게으르게 살았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내 태도는 두가지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원망하거나 체념하거나. 


그러나 서풍은 그것이 불어올 때 불어오는 것이다. 나 혹은 내 곁의 사람들이 시간 혹은 불운으로 인해 어느 순간 사라질지 모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그리고 여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특혜가 주어지지 않았다거나 고통을 면제받지 못하였다고, 엉뚱하게 전 우주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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