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맹수들의 싸움
앙리 프레데릭 블랑 지음, 임희근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 프랑스 소설들을 읽어보면 도대체 이 작가가 결론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책들이 있다. 물론 그런 소설들은 그런 소설대로의 매력이 있다. 일단 고전 소설들과는 다른 신선함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또 독자들에게 적극적 독서의 여지를 많이 주는 것이니까.

하지만 현대 프랑스 작가 앙리 프레데릭 블랑의 '저물녘 맹수들의 싸움'은 요즘의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매우 명료하게 드러나는 소설이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주인공 여자의 대사를 통해 상당히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이런 형식은 사실 현대 다른 소설들에 비해 좀 촌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처음 시작은 매우 흥미롭다. 속물적인 광고 회사 직원(모든 영화나 소설에서 광고업이란 돈만 아는 속물근성을 나타내는데 단골 메뉴이다.) 샤를르는 아파트를 세놓는다는 광고를 보고 어느 아파트 건물로 찾아가게 된다. 그 동안에도 그의 머리 속은 '집세 협상'에 관련된 속물적인 생각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중,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고장나게 되고, 그는 4층과 5층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멈춘 채로 갖혀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샤를르는 도움을 청하지만 그때 나타난 집주인 여자는 도대체 그를 구해 줄 생각이 없다. 샤를르는 이 책이 진행되는 20일 동안 엘리베이터에 갖힌 채로 엘리베이터의 틈을 통해 집주인 여자와 결론없는 대화만을 계속할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엘리베이터에 갖힌 이후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게 된 남자.' 샤를르는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 보지만 엘리베이터에서 탈출할 수 없다.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의 연출은 하나의 환상소설 같기도 하다. 이런 환상적 상황의 전개와 함께, 집주인 여자의 설교가 계속되는데 그녀의 설교는 단연 그의 속물 근성과 그를 그렇게 만든 현대 사회를 한탄하는 것이다. 이는 이 작가의 다른 소설 '잠의 제국'을 통해서도 다시 나타나는 주제로, 이를 통해 작가의 서구 현대 사회(-물론 우리네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에 대한 비판의식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현대인들의 물신주의와 불필요하게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나 역시 그러한 사회 행태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소설의 스토리나 형식면의 미숙함과는 관계없이 읽는 동안 상당히 마음이 편안해졌다. 뭐, 집주인 여자의 노골적인 설교가 약간 민망하고 결말 부분이 좀 의외이긴 했지만 어째든 읽는 동안 상당히 흥미롭고 마음을 달래주었던 소설이었으니 성공적인 독서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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