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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아버지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4
존 버닝햄 지음, 박상희 옮김 / 비룡소 / 1995년 9월
평점 :
난 친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할아버지와 '관련'된 기억이라고는 그저 할아버지의 장례식이다. 어느밤, 엄마의 손을 잡고 긴 횡단보도를 건너던 기억, 시골 한옥집 어느 방에서 관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기억. 그리고 왜 장지에 오빠만 데리고 가는가, 난 왜 따라가면 안 되는가 하는 의문을 품었던 기억이 있다. 내게 친할아버지는 그렇게 죽음으로 기억된다. 존 버닝햄의 <우리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와 죽음을 다루고 있다. 여자아이와 할아버지, 그리고 그의 죽음. 아이의 상상 속 세계와 그 세계를 웃으며 지켜주는 할아버지. 때론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으로 등을 보이기도 하지만, 또 돌아서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 정다운 친구가 된다.
이 책에서 버닝햄은 <지각대장 존>과 반대되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각대장 존에서 존이 학교 가며 꿈꾸었던 판타지의 세계는 환하고 따뜻한 노랑, 주황, 연두빛 물감의 향연이다. 하지만 선생님과 마주한 현실의 순간, 존의 세계는 가늘고 날카로운 검은 색의 펜 선이 지배한다. <우리 할아버지>에서는 이와 반대의 법칙이 적용된다. 주로 왼쪽 페이지에 그려지는 아이와 할아버지의 상상 속, 혹은 추억 속 세계는 가늘고 흐린 펜으로 펼쳐진다. 반면 아이와 할아버지가 함께 머무는 현실의 세계는 색색의 펜과 색연필들로 채워져 따뜻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느낌을 전해준다. 아이의 꿈, 혹은 할아버지의 추억, 그렇게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상상의 세계는 가늘고 흐린, 조금씩 흔들리는 선, 여리고 아스라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둘이 만나 소통하는 현실은 비록 오해, 죽음 등 이들을 방해하는 여러 난관이 있지만 따뜻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그래서 혼자 남겨져 가늘게 떨고 있는 아이도, 덩그러니 남아 있는 할아버지의 초록빛 빈 의자도, 단절과 무한정의 슬픔 보다는 해 뜨는 새 생명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너무 멀리 있어 설명하기 어려운 죽음이라는 소재, 이렇게 여유롭게 다룰 수 있는 존 버닝햄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