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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 - 세상이 당신에게 은밀히 요구하는 것
김범진 지음 / 갤리온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자기계발서가 늘어났으면 좋겠다. 있어 보이게 하드커버로 제작하고, 줄간격은 벙벙히 띠어놓고, ‘력’이니 ‘법’이니 ‘술’이니 하는 접미사를 붙여 표지를 뒤덮은 제목과 카피들로 가득한 책이 아닌, 좀 새로운 자기개발서. 투박한 생김새만 갖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런 모양인데 내용은 오죽 지루하겠냐는 개탄이다. <섬세>는 노란색으로부터 연두색으로 그라데이션된 표지가 고와서 집어들었다. 제목 위의 ‘세상이 당신에게 은밀히 요구하는 것’도 은근 낚는 카피였고. 띠지의 문구도 꽤 설득력 있다.
섬세해진 당신이 가장 많이 듣는 말 “반드시 당신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는 자기개발서의 저자들이 잘 결합시키는 요소인 경제, 정치, 사회, 고전, 위인 말고도 패션, 드라마, 맛, 일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거시적인 것에 대한 이해와 사소하고 미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맞물려 이 책을 균형을 이룬다. 사회에 대한 통찰도 있고, 일상에 대한 공감도 있어 멈칫하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간절히 바라는 남자는 사랑해줄 남자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줄 그런 남성이라며 변화한 사회의 예시로 든 것은 꽤 적절하단 생각이다. 저자는 이성과의 사랑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싸움에서 이성의 사랑이 패배하는 시기가 온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놀라워하고 있는 나로서(과연 나만 그럴까?) 시의적절한 물음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명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 섬세한 미적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작은 곳까지 주위를 기울인 뛰어난 제품”이 명품이며, 역시 섬세한 안목을 지닌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BMW에는 4명의 (차 안의)냄새 디자이너와 16명의 도어 소리 디자이너가 있다는 예시도 재미있다. 나 역시 차를 바꿔 탔을 때 방향지시등의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던 일이 생각났다. 명품에 대한 무분별한 소비, 허영, 마케팅에 대한 논란들을 보며 실소한 기억들이 있어서인지 각별하게 읽었다. (개인적으로 지적 허영은 좋고 물건에 대한 허영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 파는 것도 장사고, 명품 파는 것도 장사다.)
좋았던 부분을 옮긴다.
“‘거침과 섬세함’. 이것만큼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를 명료하게 나타내는 단어가 있을까. 선진 사회일수록 섬세하다. 후진국의 정치인들은 거친 말과 몸싸움으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한다. 시민들 역시 폭력 시위를 하며 자신들의 집단적 이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저자는 이 부분을 쓰며 조승희의 버지니아 총격 사건을 예로 들었다. 그 어떤 폭력적 보복이나 비난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조승희를 그렇게 방치하는 사회 시스템과 자신들의 무관심을 반성하는 의견들이 있었다며, 미국의 저력을 이야기했다. 씁쓸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아직도 색깔을 거론하는 보수 언론의 광기어린 헤드 라인, 집단적 항의로 변질된 촛불시위, 잊을만하면 욕설과 폭력이 등장하곤 하는 국회 생각이 났다.
내가 사장이라면, 전 직원에게 돌리고싶은 책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 책이 얼마 팔리지 못했으리라는 것. 이런 책이 팔리고 입소문을 타야 자기계발서 시장도 새로운 파이가 생길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