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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현기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4월
평점 :
#45. 현기영,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에세이, 260p)

소설가 현기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체 읽어보게 되었다.
아마 저자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면 이번 작품의 의도에 대해 보다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소설가가 쓴 산문집, 도서분류상 장르는 에세이인데 수필보다는 산문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산문의 정의를 이해하고나니 보다 더 글쓴이의 의도가 와닿았다.
1) 산문은 생활문이나 수필, 에세이 등으로 성장할 수 있다.
2) 일상을 주제로 하거나 자연이나 시사에 관한 일을 쓰는 경우도 있다.
3) 수기와의 차이점은 수기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사실적으로 쓰는 글인 것에 비해
산문은 문학적 특성이 있다. 즉 자연이나 시사 등에 대해 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 글에는 제주도의 자연과 역사적 사건인 제주 4·3 사건이 수차례 언급이 됐다.
산문의 문학적 특성대로 자연과 시사에 대해 쓴 산문집인 것이다.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난 저자 현기영은 1975년에 등단했다고 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산문집은 소설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 이어서 두번째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런 형태에 장르가 낯선 편인데 산문의 개념을 이해하고 나니 감동이 두배가 됐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읽을 때는 이런 것까지도 출간이 되나 싶었던 주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게 인상적이였으며 많은 감동을 주었던 내용을 조금 소개해볼까 한다.
이름들
사물의 이름들은 사실은 그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고 노자는 말했다.
세상에는 사물 없는 이름들, 실체가 없는 이름들이 횡행하고, 사물을 왜곡한 이름들도 많고, 이름 없는 사물들도 많다.

이른 봄 숲에 가서
내가 산행 벗들을 따라 북한산의 나무와 풀의 이름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재작년부터다.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가 귀찮아진 나이에 이르러 그 대신에 북한산의 나무와 풀과 사귀기 시작한 것이다.
이십 년 훨씬 넘게 오르내렸건만, 산의 실체를 이루고 있는 나무와 풀에 대해 너무 무심했다.
나무와 풀의 이름을 익히기 시작하자 산행의 기쁨은 두 배로 커졌다.
시간의 강물을 거스르며
인간은 습관 즉 거듭된 반복을 통해 기억할 뿐만 아니라, 단 한 번 발생하고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
비록 그것이 아주 사소한 사건들일지라도 기억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느 날 어느 순간, 불현듯, 예기치 않게, 난데없이, 느닷없이, 무심중에, 일회성으로 한 번 명멸하고 사라진
어떤 과거의 한 순간이 오랜 세월의 그 죽음 같은 암흑을 뚫고 문득 의식의 표면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의 감동이란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과거 시간은 대부분 깜깜한 암흑 속에 잠겨 있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그래서, 우연히 회상되어진 과거의 한 순간이 우리를 그토록 희열에 휩싸이게 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순간이 세월이 흘러도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현재성, 즉 생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그 순간에, 인생이 짧고 덧없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믿음이 생겼노라고 말했다.
죽은 자는 힘이 세다
대학살의 그 가해자들은 훗날 어떻게 되었나. 죽은 자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가해자의 마음속에도 살아 있다.
그들은 피해자들의 죽음을 통해서 승진하고 권력을 얻었다. 탄탄대로의 출세 가도가 펼쳐져, 장군도 되고 총리도 되고 사장도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죽인 희생자들이 완전히 말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은 자는 더할 나위 없이 무력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의 그의 힘이다'라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다.
그러나 가해자들과 그 상속자들은 사죄하기는커녕, 죽은 자들을 다시 한 번 죽이려고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이 죽은 자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있다.
죽은 자는 힘이 세고, 억울한 죽음일수록 힘이 세고, 죽은 자의 시간은 영원하다는 걸 그들은 모르고 있다.
강의 자유

인간은 누구나 자연이 낳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속에 축소된 자연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도시인에겐 그것이 드러나지 않은 채 잠재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불안의 원인이다.
우리가 자연 속에 있으면 아늑한 행복감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자연 속에 있어야 인간이 완전해진다는 뜻을 것이다.
메멘토 모리

그러나 수면 연장은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고통의 몇 개월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기술에 의한 수명 연장이란 바로 그런 정도 잠깐 동안의 연장일 뿐이다. 지는 해를 막을 도리는 없다.
사시나무
국어사전 속에서 사어(死語)들의 묘역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데, 이런 형편이라면 차라리 그 단어들을 고어사전에다 이장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나처럼 나이 든 작가들의 머릿속에는 사어가 되어버린 단어들이 그득할 텐데, 경박한 새 단어들에게 문장을 주고 문맥을 주어 세상에 내보낼 수 없는 처지가 참 한심스럽다. 민중이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자연친화적인 비유들이 이제는 많이 사라졌다.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즐거움만 좋아하다보니 진정한 슬픔을 잊어버렸다. 진정한 슬픔을 오히려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슬픔도 이제는 과거의 정서가 되어버린 것 같다. 슬픔이 낯설어졌다.
승자독식의 아사리판에서 눈물은 단지 패배를 뜻한 뿐이다.
슬픔은 아는 자가 진짜 인간일 텐데, 우리는 더 이상 슬픔을 모른다.
노년의 작가가 쓴 산문집에서 생각지도 못한 많은 배움을 얻었다.

아직도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 이 책은 다산북스로부터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