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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9월
평점 :
장강명 작가가 권장하는 독자들의 '문예운동'에 동참하는 뜻으로 리뷰를 쓴다.
읽고 쓰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나. 가끔 그런 회의가 들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는 아직까지 너무 조금 읽었고, 진지하게 써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섣불리 의미를 말할 처지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의미를 묻고 따지는 것은 나의 고약한 버릇이고, 읽고 쓰는 세계 거주자들의 운명인 것 같다. 그것은 힘이고 은총이며 고통이자 저주다. 나는 이게 어느 정도 죽음이나 소멸과 관련이 있는 문제가 아닐까 추측한다. 중력을 버티기 위해 골조를 세우는 것처럼 시간을 버티고 싶어 의미를 구하는 것 아닐까." (200쪽)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어 없어질 몸, (그게 뭐든) 뭘 그렇게 연연해. 다 의미 없으니, 그냥 맛있는 거 먹고 가볍게 살자고. 보지 않을 때도 TV를 켜놓고, 죽음 같은 걸 생각하며 두려워하거나 구슬퍼하지 않도록, 지나치게 진지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살살 살다가 의식하지 못한 채 소멸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나 역시 읽는 저주를 타고나서인지, 무의미하다면서도 자꾸 의미를 찾으려 들고, 본질에 대해 집착하게 된다. 놀고먹더라도 골조를 세우고 그 안에 들어앉아 하고 싶은 거다. 어정쩡하게 경계에서 들락거리지 말고 이젠 차라리 읽고 쓰는 세계의 성실한 시민이 되는 게 나으려나.
책에 대한 물신숭배가 없어 좋았고, 보통 읽기에 관한 책들의 '책을 읽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책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한다.'는 순환논법이 없이,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이지만 나는 읽고 있고, 앞으로도 읽을 거고, 심지어 당대에 배척당하더라도 후대손손 영원히 읽히고 싶다는 작가의 태도가 통쾌한 한편, 아 이 사람 진짜 진심으로 진지하잖아. 아 뜨거라 싶었다.
절망조차 불성실한(사이바라 리에코의 표현) 나 같은 인간도 처음엔 삐딱하게 보다가 점점 자세를 고쳐 앉고 고개를 끄덕일 만큼의 진지함. 아마도 이 작가가 가진 최고의 재능은 이것 아닐까.
+ 덤으로 얻은 장강명 리스트
블랙 달리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개선문
분노의 포도
노르웨이의 숲
1984
13계단
단 한 번의 시선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앨저넌에게 꽃을
앰버 연대기
벌거벗은 얼굴
개의 힘
사실 내게 진짜 두렵고 걱정스러운 일은 사람들이 문학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문학과 문학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 P253
우리는 최근 1년 동안 나온 책 중 가장 뛰어난 책, 가장 가치 있는 책을 과연 알아볼 수 있기는 한 걸까? 애초에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 어떤 책이 시대를 앞섰다면 그 작품은 당대에 환영을 받을 수 없다. 그게 바로 시대를 앞섰다는 말의 의미다. - P209
한때 웹소설을 써볼까 고민했던 이유는 거기에 독자들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가끔은 한국문학이 이제는 일반 대중과 거의 유리되어, 전국에서 몇 만 명 정도가 즐기는 독립 예술이나 마이너 장르가 된 게 아닌가 싶은 폐쇄감이 든다. 몇 만 명이라면 한국 인구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수치인데, 작가고 편집자고 문학평론가고 그 범위 밖은 아예 상상도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 단순히 규모가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창작과 비평의 지평이 어떤 소수 취향에 갇혀가는 것 아닐까. 자신들은 시대를 앞선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점점 게토화, 갈라파고스화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의 문제다. - P215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식사나 뜨거운 물줄기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그것들을 희생시켜가면서 구하려는 게 있다. 그걸 품위라고 부를 순 없을 거 같고, 의미? 글쎄... 그렇게 불러야 할 테지만,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발견하려는 우주적 진리, 혹은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삶의 중심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내가 좇는 그 ‘의미‘가 객관적인 것인지 주관적인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보다 크고 나의 바깥에 있으면서 내 안에도 있는 무엇.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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