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사랑 1
손성조 지음, 손비야 표지그림 / 문학공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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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선배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서로 만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얼추 비슷한 시기, 비슷한 태도로 대학생활을 했다는 공감대로 인해 쉽게 마음을 연 그런 선배였다. 

그 선배는 오래전부터 소설을 쓰고 있었다고 했고, 곧 출간을 앞두고 있으니 한 번 읽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어떤 소설이냐고 물으니 그 선배는 이내 “장편통속연애소설”이라고 정의를 내려주었다. 

장편… 통속… 연애… 소설?

한가하게 소설이나 읽을 여유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보내달라고 했다.

소설을 쓰다보니 애초에 의도했던 것보다 길어져 4권으로 늘어났고, 출판을 위해 그 중 두 권을 앉혔으니 두 권을 먼저 보내주겠다고 했다.

소위 출판인끼리 통하는 ‘앉혔다’는 의미는 출판 전문 프로그램으로 편집을 마쳤다는 의미이다.


한 권이 먼저 카톡으로 왔다.

책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보통 소설을 읽을 땐 맨 처음이 가장 힘들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다른 세상을 살아온 사람과 처음 만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그 만남은 내가 선택한 만남일 수도 있고, 지인의 소개로 시작된 만남일 수도 있다.

이번 경우는… 호기심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저 인간이 과연 어떤 소설을 썼을까 하는…


처음엔 긴장을 하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

어색한 표현과 심지어 오타도 몇 개 잡힌다… ‘그렇지, 그 인간이…’

완벽한 상대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하지만, 지극히 인간다운 어설픔 몇 자락은 나의 경계심을 흩뜨려 놓는다.

소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그 선배의 인생, 그 내면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어 갔다.


이야기의 시작은 내가 대학 새내기 때인 1988년이다.

‘응답하라 1988’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단면 중 ‘골목’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지금은 사라진 골목…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응팔을 보며 그 ‘골목’을 추억했다.

그 당시 난 그 골목에 있지 않았고, 주로 대학에 있었기 때문에 응팔을 보고 추억할 수 있는 접점이 많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 이야기의 배경이 내가 살았던 쌍문동 103-144번지, 바로 옆 골목이었음에도 말이다. 


1988년,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대학이다. 주인공은 85학번에 총학에서 일하고 있는 운동권… 선배이다.

슬슬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글자를 세면서 읽기 시작한 소설이 이제는 문장을 하나씩 건너 뛰면서 읽고 있다.

내가 대학교 새내기 때 겪었던 많은 사건들이 비교적 나와 다르지 않은 시선과 문제의식으로 펼쳐진다.

얼마전 노래패 후배들로 인해 만났던 22년 전 내 모습으로 인해 가뜩이나 마음이 싱숭한데, 

이제는 한 선배의 자서전인지도 모를 경험담이 서늘한 바람이 되어 내 마음을 더욱 생숭하게 만든다…


거기에 연애 이야기가 조금씩 덧입혀지기 시작한다.

‘그래 나도 그 당시 좋아했던 여자애가 있었지… 아니, 많았지… ㅎㅎ’


혹시라도 이 소설이 출간되면 사서 읽을 독자들을 생각해 더 이상의 스포는 자제한다.

대신… 아직 마지막 4권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비평을 하고자 한다.


시간의 흐름은 횡적이다. 그 횡적인 시간의 흐림 위에 인간의 수직적 경험이 더해져 시대를 이룬다.

횡적인 시간을 공유했기에 한 시대를 산 사람들 간에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무관하게 직립보행을 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든 역사와 경험까지 완벽하게 공유되지는 않는다.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공감과 공유의 차이… 그 수직적 경험들은 때때로 여기저기 무리를 이루며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저 시공간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간의 끈들이 조금 더 촘촘해 진 것 뿐이다.


작가가 주장했던 바, ‘장편통속연예소설’의 주제인 연애가 주제로 떠오르면서 주인공은 내가 지레짐작으로 걸쳐놓은 공감의 끈들을 하나씩 끊어 나갔다. 그 끈들이 모두 끊어졌다면 난 중간에 소설을 덮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다소 막장(?)으로 전개되면서 이제는 작가가 아닌 내가 그 공감의 끈을 끊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처음에 지레 걸쳐놓은 공감의 끈들이 모두 끊어졌다고 생각할 즈음, 내 다른 손은 나도 모르게 작가가 무심하게 던저 놓은 다른 공감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노련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 책 읽기를 멀리했던 내가 그렇게 소위 공감의 끈들을 끊어내고, 붙잡고를 반복하며 3권을 몰아쳐 읽었으니 말이다. 

소설을 읽던 중, 저자와 개인적인 소통을 시도했을 때 저자는, 자신이 독자들에게 어떤 끈을 던져 놓은 것은 맞지만, 그 끈을 붙잡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붙잡고, 말고는 독자들의 몫이다… 라는 다소 시니컬한 답변을 받았다.  


난 저자가 책을 읽은 독자들로부터 대략 두 가지 관점으로 비판적 문제제기를, 그것도 매우 강하게 받을 것이라 추측한다.

첫째, 난 처음에 이 소설의 정체성이 ‘장편통속연애소설’이 아니라 ‘장편운동권연애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소설의 전개는 그런 나의 공감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회가 주장하는 보편적 도덕성의 가이드라인인 ‘불륜’이 등장하면서 난 뒤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시대의 진보는 횡적 시대의 끈으로 모든 주관적 수직성을 무시하거나 폄하해 온 관성이 있다. 나 또한 그러한 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소설을 읽는 도중 저자에게 “형, 참 나쁜 놈이네~”라는 카톡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 모던 사회는 나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해 온 수많은 수직성에 대해 더이상 가타부타 참견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아니마는 ‘공감(共感)’입니다. 나의 학생운동의 출발은 문제 해결에 대한 어떤 추구가 아니라 단지 공감으로 함께하고자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나는 민중이 주인 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도, 독재자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도 없었습니다. 그냥 내가 좋아했던 선배들이 나서는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들의 고민과 주장, 그로 인해 그들이 받는 고통에 공감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조국의 통일과 민중이 주인 되는 위대한 나라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나는 단지 고통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웃들의 옆에 가만히 서 있고자 했을 뿐입니다. 

나의 의식화는 고3 시절, 교육 문제에 대한 출판과 관련하여 임신한 몸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갑자기 끌려간 누나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절대로 전위가 아니고 리더도 될 수 없었으며 사실 그냥 ‘따라쟁이’였어요.

우리나라의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투쟁의 방법이나 노선은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으며 서로 입장과 행동을 달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참 많이도 서로 간에 갈등과 분열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대학 시절 남학생들이 그런 과정에서 어떤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설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반대로 오히려 소수이며 마치 운동의 한 구석에 내몰린듯한 여학생들이 공감의 깊은 눈물을 흘리는 것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녀들과 가끔 취중에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때 나는 내 내면의 아니마를 묵묵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다소 눈물이 많은 남자가 되었어요. 하지만 나는 남자였기 때문에 좀 더 바리케이드 앞으로 나아가야 했고 조금 더 멀리 돌을 던져야 했습니다.

당신이 나의 아니마를 파고 들어왔듯이 반대로 보면 그 시절 당신은 온화하고 따뜻하며 조금은 유머러스하게 쳐놓은 나의 그물에 걸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보통보다 조금 더 깊고 부드럽게 관용과 공감의 가면을 쓰고 있는 박민수라는 깊은 늪 속으로 당신은 빨려들어 왔습니다. 

- 두 번째 사랑 3권 제5부 중에서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이 소설에서 소위 80년 대 운동권이 가지고 있었던,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아니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도덕성과 순수성을 기대한다면 그 독자는 나처럼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야이 미친 놈아, 왜 때려!"


둘째, 이 소설은 대학시절 운동을 하다 만난 첫사랑과 결혼한 남자 주인공이 두 번째 사랑을 만나 소위 양다리를 걸치게 되는 과정에서 그 정당성을 지극히 남성의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최근 가장 민감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여성주의 비판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여성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난 유발 하라리가 밝혀내지 못한 가부장제의 근거에 대해 다양한 추론을 해 보고 있는 중이다. 


흔한 고정관념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보다 남을 조종하고 유화책을 쓰는 능력이 우월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도 뛰어나다고 한다. 이런 고정관념에 진실이 조금이라도 포함되어 있다면, 여자들은 뛰어난 정치가나 제국 건설자가 되었어야 한다. 전장에서의 더러운 일은 테스토스테론이 가득 찬 단순한 마초들에게 맡기고 말이다. 대중적인 신화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확실하지 않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중에서


하여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 사피엔스가 생존을 위해 관계를 선택했듯, 여성들은 물리력을 앞세운 마초같은 남성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단지 관계를 맺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이용해 왔을 가능성… 그리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산력 발전의 정도가 여성들의 입장에선 가부장제가 생존이라는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허용 가능의 범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은 늘 무언가 공통으로 해결해야 할 절박한 목표 앞에서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양보해 왔다. 내가 먹고 사는 게 바쁘면 대통령에게 모든 통치의 권한을 위임하지만, 그 권한의 위임이 몰고온 집단적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 앞에서 인간은 개인적인 일을 뒤로 하고 광장으로 뛰쳐나와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인류의 장구한 역사 또한 다르지 않다. 농업혁명은 인류에게 정착이라는 달콤한 선물을 주었지만, 동시에 급격하게 늘어난 개체수로 인해 생존에 필요한 생산력 확대라는 숙제도 안겼다. 어쩌면 계급사회로의 이행은 생산력 확대라는 절박한 목표 앞에 인류가 지배와 피지배라는 불평등 구조를 허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여 지금까지 인류는 더 우월한 사람의 지배가 생산력 확대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그 지배를 허용했다. (마치 인과관계처럼 표현했지만, 이는 동시에 의도와, 의도와 무관하게 전개된 역설적 결과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맑스의 예견처럼 자본주의에 이르러 인류의 생산력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어 이제는 굳이 생산력의 확대에 몰두하지 않더라도 분배만 잘 이루어진다면 인류의 생존을 위한 더이상의 생산력 확대를 필요로하지 않게 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인류가 생존을 위해 허용했던 수없이 많은 관성들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계급과 가부장제 아닐까?

부르주아 혁명을 바탕으로 성장한 인간의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동물적 욕구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고, 맑스의 이론에서부터 출발한 계급 투쟁의 역사 속에서 단련된 여성들은 이제 길고 긴 억압의 터널인 가부장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다. 

난 소설을 읽으며 그러한 여성주의적 주장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아직은(?) 인정할 수 없는 과도함에 대한 남성 입장의 반론? 변론? 변명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체로 이런 문제에서 노련한 쪽은 여자들입니다. 남자들은 말이에요. 대부분 서툴다고 봐야 합니다. 여자들은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염려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여자들은 만날 때나 헤어지고 난 다음에도 내가 과연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였나? 당신들은 자신의 섹스어필을 염려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마주 보면서도 가끔 그녀의 벗은 몸을 상상하지만, 여자는 옷을 벗는 순간에도 어떻게 보일까를 걱정한다지요.

앞을 보지 못하는 남자가 아니라면 본다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겠지요. 그것 때문에 당신들은 졸려 죽겠는데도 화장을 지우고 세안을 하고 오버 나이트 크림을 다시 바르고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얼굴을 그리고 하는 그런 귀찮고 소모적인 행동을 반복합니다. 

<중략>

자연으로 볼 때 인간의 아이들은 사실상 모두 일종의 미숙아들입니다. 몇 년이 가도 기본적인 먹고 싸고 조차가 안 되는 인간의 아이들은 엄마의 시간과 엄마의 젊음을 송두리째 앗아갑니다. 10년이 가도 성징(性徵)이 완성되지 않고, 20년이 가도 성장(成長)이 멈추지 않는 이 인간의 자식은 우리 종이 만든 최대의 괴물이며 실패작입니다.

- 두 번째 사랑 3권 제5부 중에서


소설 속에는 주인공은 이렇게 여러 차례 여자에 대해 주관적 해석과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 해석과 주장이 저자의 것인지, 아니면 그저 픽션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개연성을 위한 장치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어찌되었든 저자는 창작이라고 하는 숭고한 작업의 뒤에서라도 수없이 많은 남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섣부른 비평에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소설을 읽는 내내 주인공에 감정이입되어 마치 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가족들을 평소처럼 대하지 못하였다. 감정이입을 당했는지, 내가 자발적으로 감정을 이입했는지는 솔직히 나도 정확히 분리해 낼 수 없다. 위에 페미니스트들로부터의 비판을 걱정했지만, 그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비자발적으로 존재하게 된 모든 것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까지 나가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이 내 탓은 아니지 않는가… 맑스의 말처럼 모든 인간은 관계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대상을 나와 분리하여 배척하는 것은 슬기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운동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양성평등이 아닌, 성평등을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사회는 과거처럼, 자본가와 노동자, 여성과 남성으로 이분화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적 작가는 남성들의 심리(수면 아래 깊숙히 감추어져 있는 욕망까지도…)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내가 알 수 없는 여성들의 심리도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으로는 매우 설득력 있게 묘사한 것 같다. 

어쨌든 곧 이 소설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들에게 던져질 것이다. 가능한 많은 사람이 읽고, 그 책을 통해서 느낀 다양한 감정들이 비폭력적 논쟁의 도마 위에 올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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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명견만리 : 미래의 기회 편 - 윤리, 기술, 중국, 교육 편 명견만리 시리즈
KBS '명견만리' 제작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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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집밥 열풍이 불고 편의점 상품이 뜨는 것은 단순한 기호의 변화라기보다는 경제의 기조 변화를 반영한 트렌드다. 전세계가 저성장 국면으로 진입하면서 우리의 일상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 알라딘 eBook <명견만리: 미래의 기회 편> 중에서


트렌드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트렌드를 읽어내는 관점 또한 중요하다. 최근 일고 있는 ‘집밥 열풍’은 저성장의 징후로 볼 수도 있지만, 공동체 파괴의 결과일 수도 있다. 


❏ 인류진화의 키워드 ‘관계’

인간과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인류의 결핍이 낳은 가장 풍요로운 산물이다. 인류는 생존에 필요한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관계를 선택했다. 그렇게 선택된 관계는 인류 진화의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생존과 관계 없는 능력은 사라지고,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은 확대, 강화되어 온 것이 곧 인류가 걸어온 진화의 과정이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관계가 아닌 강한 이빨과 발톱을 원했다면, 인류는 문명이 아닌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 분명하다. 인류는 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위해 분절적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관계를 보다 안정시키고자 하는 강한 정착의 욕구가 농업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어디 그 뿐이랴, 인류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성’ 또한 갈수록 정교해지는 관계의 유지에 방해가 되는 ‘동물적 본성’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 ‘소비’를 통해 결핍을 해소하는 신자유주의형 인간의 탄생  

따지고 보면, 제도와 관습을 포함하여 인류가 성취한 그 모든 문명은 관계를 위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of the 관계, by the 관계, for the 관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어진 계급사회 또한 지배와 피지배라는 관계가 있어야 그 유지가 가능하다. 마치 빙산의 일각이 빙산의 잠긴 부분을 딛고 수면 위로 떠 오를 수 있는 것처럼, 계급사회에서의 지배계급 또한 지배할 껀덕지인 피지배계급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결핍의 산물이고,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므로 결핍이 사라지고 나면 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다. 계급이 생산력 발전으로 인한 잉여생산물로 인해 발생한 것처럼,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과잉된 생산은 인간이 서로 구차하게 관계를 맺지 않아도 소비를 통해 모든 결핍을 해소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관계 해체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어쩌면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인류가 성취해 온 문명과 전혀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토대 위해 관계보다 소비가 익숙해진 상부구조를 가진 인류 앞에 이제 저성장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화두가 던져졌다. 


❏ 4차 산업형명 ‘트렌드’에 대한 이해보다 관점이 중요하다!

만약 빙산의 일각이 수면 아래 잠겨있는 부분을 잘라내고도 수면 위에 자유롭게 떠 있을 수 있다면?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이윤을 챙기고 있는 자본가들이 구질구질하게 그 관계에 의존하지 않아도 이윤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다면? 한때 인간의 능력에 필적하는 인공지능의 개발에 대해 우려를 표했던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2015년 10월 온라인 커뮤리티 레딧에 “기술의 발전이 불평등을 가속시키고 있다”며 “로봇보다 자본주의가 더 무섭다”고 경고했다. 스티븐 호킹의 경고처럼 4차 산업혁명 속에는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끊어내기 위한 자본가들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면, 노동자와 관계를 통해 해소해 왔던 자본주의의 결핍이 사라지게 되므로 당연히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도 소멸하게 될 것이다. 그 관계의 소멸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부연은 따로 하지 않겠다. 

그런 관점에서 가끔씩 SF 영화를 통해 등장하는 인공지능이 장차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미래사회에 대한 공포는 본질과 전선을 은폐하기 위한 음모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걱정해야할 미래사회의 문제는 인간대 인공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자본가대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다. 


❏ 다시 ‘관계’의 관점에서…

우리가 트렌드를 파악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가장 기본적은 것을 무시한 채 너무 멀리만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인류는 직립보행을 통해 이전보다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눈이 발에 달려 있지 않고 머리에 달려 있는 이유는 분명 멀리 보아야 생존에 유리하다는 진화론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이 아무리 멀리 내다볼 수 있어도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내 발이 움직여 주어야 한다.

만리를 내다보는 눈으로 트렌드를 파악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이유는 내 발이 그 결과를 지향하도록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다. 

현재 우리의 발은 인류 진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관계를 무시하고 소비라는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북유럽 복지국가의 시작이 관계를 부정하는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노사대타협이라는 관계 개선의 결과라는 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투쟁이 소모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투쟁이든 타협이든 관계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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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괴물과 함께 살기 -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루만까지 한 권으로 읽는 사회철학
정성훈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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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시민사회는 일찍이 정치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자본주의 성장과정에서 점차 경제 영역으로 그 역할이 이동되어 왔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과정 속에서 서구의 시민사회는 독특한 경제적 경험을 축적했을 것이다. 반면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는 해방이후 독재정권과 투쟁해 온 재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과, 대한민국의 압축적 경제성장을 이끈 개발독재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점 등, 아직도 정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측면이 없지 않다. 정치적 시민사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비타협적 이념 투쟁의 근육을 단련시켜 왔다면, 경제적 시민사회는 경제의 효율적 성장을 위해 이견에 대한 절충과 타협 능력이 요구된다. 대한민국의 시민사회가 "질이나 구조, 성능 등을 고쳐 더 좋게 함"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개량'에 대해 경끼를 일으키는 이유도 정치적 정체성이 경제적 정체성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비난이나 비판이 아닌 보완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다음은 정성훈의 '괴물과 함께 살기'에서 인용한 글이다. 

스미스에서 시작된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이 사람들의 자유로운 자기애 추구와 활발한 거래 및 교환을 위해 국가의 역할을 소유권 보호로 최소화시켰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이 간파했던 사회구조 변동의 방향은 국가의 최소화라기보다는 정치와 경제의 ‘분화differentiation’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로크 시절까지도 유지되었던 ‘시민사회는 곧 정치사회’라는 도식이 점차 깨진다. 정치가 사회를 대표하던 시대가 끝나고 정치와 사회 혹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것으로 파악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치나 국가가 아닌 경제가 사회 또는 시민사회를 뜻하게 된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19세기의 여러 지식인들의 글에서 ‘사회적social’이라는 말은 ‘정치적political’과 대립되는 수식어로 쓰였다. 즉 사회란 국가나 정치가 아니라 경제적 토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영역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 것이다.

-알라딘 eBook <괴물과 함께 살기 :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루만까지 한 권으로 읽는 사회철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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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게임 - '세대 프레임' 을 넘어서
전상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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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벌어지는 세대 전쟁의 해법 찾기가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세대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 131쪽 중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생산력 확대의 성취를 이룬 자본주의와 그것을  방에 날려버릴  있는 핵무기로 인해 우리는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다원래 가진 것이 많으면 포기하기도 힘든 ... 인류는 최근 몇백년 사이 핵무기 한 방으로 날려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문명의 성취를 이루어 냈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야만과 물리적 전쟁이 사그러 들었다고 해서 인류가 더 행복해졌다는 것에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지나친 평화는 자본주의에 해롭다. 일찍이 1930년을 전후해 경험했듯 아무리 신자유주의로 화장을 바꿨다고 해도 여전히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치명적인 모순은 과잉된 생산물의 처리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결핍된 불행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세대 전쟁은 물리적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시대에 불행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대 전쟁은 세대 간에 벌어지는 소득과 소비를 둘러싼 전쟁이라 자본주의적으로도 매우 유익하다.


“세대를 겨냥하는 세대 전쟁론적 개혁의 예리한 창은 문제의 구조적 원인, 예컨데 자본, 기업, 그에 기생하는 정치 권력과 같은 원인들을 겨누지 않는다. 그런 탓에 세대 전쟁론이 내세우는 청년에 대한 배려는 말잔치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청년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 차별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p. 81)

"하지만 늙은이들의 사정이 나아진 까닭은 복지 정책이 개선되었기 때문이지만, 젊은이들의 사정이 악화된 것은 복지국가가 그들의 몫을 빼앗아서가 아니라 노동 시장의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p. 116)

"사실 빈곤 문제는 전통적으로 ‘계급’이나 ‘계층’의 사안으로 다뤄졌다. 하지만 세대 전쟁론자들은 이를 세대의 문제로 새롭게 번역해냄으로써 앞서도 인용했던 레스터서로의 묵시론적 예언을 따른다. '가까운 미래에 계급 전쟁은 빈자와 부자의 대결이 아니라 젊은이와 노인들의 싸움으로 다시금 정의될 것이다.'" (p. 118)

"세대가 가진 매력을 활용하여 꾸며진 세대 전쟁론의 도덕적 명확성은 아주 훌륭한 “대량 주의분산 무기”다.” (p. 122)


세대학자(?) 전상진은 세대 전쟁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허구에 대해 오랜 시간 침묵(?) 왔다  침묵은 ‘세대 게임’이라는 새로운 세대 논리를 벼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전상진은  「세대 게임」 4장, '세대 전쟁-청년 대 기성세대의 대결'에서 기존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세대 전쟁의 4가지 요소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첫번째, ‘저출산 고령화 인해  국력이 추락하고 성장 동력을 상실하고,  노인 세대에 대한 부양비가 늘고 혁신의 잠재력이 고갈된다는 논리.
두번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인의 투표권 행사로 인해 탐욕스러운 노인이 세상을 지배하게  것이라는 ‘노인의 지배’ 논리.
세번째고령자들이 과거에 사회보장 체제에 투입한 기여보다 현재 받는 급여가  많다는 “세대 형평성”과 “세대 회계” 논리.
네번째,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생산 세대’는 미래의 생산 세대인 ‘양육 세대’와 과거의 생산 세대인 ‘부양 세대’를 먹여 살리는 패자이고, 양육 세대와 달리 미래 노동 가치가 없는 부양 세대는 승장 세대라는 복지국가 세대 논리.

지금까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음직한 세대가 서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논리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정리했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 그래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우리가 세대 전쟁론을 듣거나 주장하면서 답답한 이유는  답이  보이기 때문이다마치 우리는 절벽으로 향하고 있는데길이 절벽으로 가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멈추지 못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하다자본주의의 달콤한 소비에 빠진 우리는 절대 멈추거나 되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4장의 마지막 절인 ‘세대전쟁론 비판’에서 전상진은 바로 자신이 직접 매우 설득력 있게 전달한 그 세대 전쟁 논리를 처참하게 깨 부순다. 아니, 아예 잘근잘근 씹어서 가루를 내 버린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한국에서 벌어지는 세대 전쟁의 해법 찾기가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세대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p. 131) 원문을 그대로 카피해서 붙인다면 모를까, 그 면도날 같은 논리의 전개를 발췌해서 요약하는 것은 내 빈약한 능력으로는 무리다. 자세한 내용은  「세대 게임」, p. 101 ~ 107을 참조하기 바란다. 개인적으로  「세대 게임」의 엑기스는 그 일곱 페이지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음모론의 시대”도 읽어보았지만전상진의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논리적 설명을 위해 논리를 너무 쪼개는 경향이 있다전체를  개의 논리로 나누고  각각의 논리를  세분화하여 설명한다. 마치 드론에 올라타 있는 느낌이다. 하늘 위에서 숲을 조망하다가 갑자기 숲 속으로 곤두박칠 쳐 나무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디테일을 살핀다. 그러다가 다시 숲을 조망하기 위해 부상한다. 현기증이 난다. PT 친다면 파워포인트식 나열 구성이 아니라, 전체와 부분을 넘나드는 프레지식 논리 전개랄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명쾌한 논리의 전개를 경험한다. 마치 롤러코스트를 탄 후 울렁거리는 속을 사이다로 시원하게 진정시키기라도 하는 것 같은...


세대학자 전상진은 세대 논리는 그 논리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책임을 전가하고, 지지자를 확보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player가 존재하므로... 그렇기 때문에 세대가 당사자가 되어 치르는 ‘세대 전쟁’이라는 단어는 세대 논리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대들의 싸움판에서 취할 수 있는 역할은 다음의 세 가지라고 충고한다.

① 만약 이미 재벌에 속해 있거나 정치를 할 생각이라면 세대 게임의 Player가 될 수 있다. 
② 세대 게임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세대 전쟁터에서 소모되는 대체 가능한 병졸이 될 것이다.
③ 그래서 세대 게임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심하고 주저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세대들의 싸움판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취할지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숙고하여 판단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제1장 ‘의심하고 주저하기’의 도입부에 있는 ‘파울 파츨라비크’의 우화를 소개한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는 취객과 경관.
경관은 취객에게 묻는다. “정말 여기에 읽어버린 게 맞소?”
취객은 말한다. “여기가 아니라 저긴데, 저긴 가로등이 없어서 못 찾아요.”

‘선의’를 가지고 돕던 경관은 취객의 ‘지휘’ 아래 헛된 일만 한다.
혹시 우리도 ‘세대 프레임’의 강렬한 불빛에 현혹되어 
엉뚱한 곳만 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벌어지는 세대 전쟁의 해법 찾기가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세대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p. 131)

세대를 겨냥하는 세대 전쟁론적 개혁의 예리한 창은 문제의 구조적 원인, 예컨데 자본, 기업, 그에 기생하는 정치 권력과 같은 원인들을 겨누지 않는다. 그런 탓에 세대 전쟁론이 내세우는 청년에 대한 배려는 말잔치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청년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 차별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p. 81)

하지만 늙은이들의 사정이 나아진 까닭은 복지 정책이 개선되었기 때문이지만, 젊은이들의 사정이 악화된 것은 복지국가가 그들의 몫을 빼앗아서가 아니라 노동 시장의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p. 116)

"사실 빈곤 문제는 전통적으로 ‘계급’이나 ‘계층’의 사안으로 다뤄졌다. 하지만 세대 전쟁론자들은 이를 세대의 문제로 새롭게 번역해냄으로써 앞서도 인용했던 레스터서로의 묵시론적 예언을 따른다. ‘가까운 미래에 계급 전쟁은 빈자와 부자의 대결이 아니라 젊은이와 노인들의 싸움으로 다시금 정의될 것이다.‘" (p. 118)

"세대가 가진 매력을 활용하여 꾸며진 세대 전쟁론의 도덕적 명확성은 아주 훌륭한 "대량 주의분산 무기"다." (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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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게임 - '세대 프레임' 을 넘어서
전상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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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문제를 심각하다고 느끼는 정책 관련자나 세대 전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세대 전쟁의 해법 찾기가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세대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 131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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