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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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를 그린다고 상상해보자. 그림에 서투른 사람이더라도, 아름답거나 추한 이목구비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 특징은 도화지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눈꺼풀이나 콧날, 하관의 표현을 보면 사람들은 그게 누구를 그리려던 것인지 가까스로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려운 것은 평범한 얼굴을 옮기는 것이다. 평범한 얼굴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억하고, 재현하는 것. 마찬가지로, 선하거나 악한 사람을 상상하기란 쉽다. 문제는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은 사람을 상상해내는 것이고, 소설가의 목표는 거기에 있다.

연년세세에서 황정은의 인물들은 조금 더 평범해졌다. 이번 소설에서 그는 순자의 평범한 얼굴을 그리기 위해 작가로서 스타일에 대한 욕심을 거의 내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아마 깨질 거라고, 깨져도 괜찮은 그릇들이냐는 한세진의 물음에 왜 깨지냐고, 조심하면 깨지지 않는다고(12) 답하는 이순일의 마음, “그 뜨거운 것을 평생 만지고도” “뜨거운 것에 닿으면 여전히 뜨겁다는”(141) 성가신 사실에 경이로워하는 이순일의 감각에 다만 존경을 표한다.

소설 속 인물들을 독자와 비슷한 남녀들이라고 말했던 사람은 디킨스였던가? 삶이 존엄하다는 보편적 고백이 공허한 말에 그치지 않으려면 우리는 먼저 평범한 개별적 존재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비슷하다는 것은 닮은 만큼이나 다르다는 것. 닮았지만, 결코 같지는 않다는 것.

그 평범하고도 고유한 웃는 얼굴을 본 이상, 우리는 와 같은 관념으로 일축할 수 없는 입장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매일 팟캐스트를 듣는다는 우스꽝스러운 힐난에 굴하지 않고 더 한쪽으로 쏠려도 좋다. 우리의 닮음, 그리고 같지 않음이 보다 온전하게 진술될 때 우리는 비로소 더 살 수 있다.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182) 황정은이 만들어낸, 누구라도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순자라는 거울은 그래서 이름을 감추는 익명이 아닌, 이름이 밝혀지길 기다리는 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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