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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평점 :

간결한 제목의 책을 만났다. 한중일 세 나라가 '세상에 없는 요리'로 맞서다는 띠지의 문구에 호기심이 동했다. 요리왕 비룡처럼 요리로 겨루는 내용인 줄만 알았다고나 할까? 맛깔나게 요리하고, 완성된 요리를 앞에 두고 음미하며, 각종 미사여구를 들먹이며 음식을 즐기는 걸 상상했는데 막상 책장을 넘기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1945년 일제 패망 직전 만주국을 배경으로 전쟁을 두려워하는 일본군 사령관 모리(야마다 오토조)와 그를 암살하려는 중국인 요리사 첸, 조선 여인 길순이 주인공이다. 태어난 순간 도마 위에 있었다는 아버지의 도마를 물려받은 첸은 일부러 잡혀 장교 식당의 전문 요리 사병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된다. 첸은 점점 비밀자경단원이 아닌 요리사로서 모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진다. 첸의 음모가 발각되고 잡혀온 첸의 아내인 길순에게 반한(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리는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길순에게 투영하는 것이지만) 모리는 그녀를 황궁으로 불러들이고, 그것을 모르는 첸은 모리와 길순을 위해 요리하게 된다.
모리(야마다 오토조)는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관동군의 마지막 사령관으로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백만 관동군을 지휘하지 못하고 소련군에게 모두 항복시켜 칠십만 관동군을 포로로 잡히게 한 역사적 인물인 그는 종전 후에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10년이 지난 후에 일본으로 돌아와 천수를 누리고(1881~1965) 죽었다고 한다.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전쟁을 좋아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아니니까. 군인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어쩜 이웃의 좋은 할아버지였을 수도 있었다.
난 궁극의 맛을 요리하려고 하는 첸과 그런 음식을 탐하는 모리보다 조선 여인인 길순이라는 인물에 더 관심이 많이 갔다. 독립운동이라는 원대한 꿈만 꾸는 오빠의 뜻을 따라 만주까지 가게 되는 여인인 길순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내들의 정욕을 해결하는 몸뚱이이자 오빠가 이루려고 하는 독립운동의 도구로, 자신보다 요리를 더 사랑하는 첸의 아내로, 모리의 어머니의 환영으로서 사랑받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의 요리는 누구보다 솔직했으며 위로를 주었다. 자신의 실력으로 무릎을 꿇리겠다는 오만함으로 만들어진 요리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재료지만 삶과 죽음이란 두 가지를 머금고 있는... 그녀가 두 남자의 대결에서 승자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작업한 돌계단 밑에 애써 원한의 부적을 숨기지 않아도, 가련한 석공의 손목을 자르지 않아도, 황궁에 잠입하여 허수아비 황제를 독살하거나 일본군 장교들을 권총으로 쏘아 죽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부처에게 빌어보고 싶어. p.49
대여섯 시에 저녁을 먹고 오후 10시, 혹은 11시에 즐기는 야참에 이르기까지, 나의 하루는 먹는 것으로 시작해 먹는 것으로 끝난다. 먹는다는 것은 내게 잠시나마 이 전쟁과 직위를 잊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요리를 먹고 나서 시게오와 가볍게 품평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요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p.121
무언가를 입에 넣어 씹는 순간은 인간이 자신의 생 앞에서 가장 진실할 수 있는 순간이다. p.122
"음식을 먹는다는 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궁극의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혀와 위가 우리의 뇌에 가져다주는 행복, 단순하기까지 한 그것을 만끽하는 신의 선물이기도 하지요." p.p.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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