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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증발 - 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
레나 모제 지음, 스테판 르멜 사진, 이주영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일본인 친구와 영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냐고... 그 영화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 친구의 말은 기억이 난다. 아이의 장례식에 참석한 아버지가 눈물을 애써 참으며 담담한 모습으로 아이를 보내는데 꽉 쥔 주먹에서는 피가 흐르는 장면이 좋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졌단다. 그 말 이후로 일본인이라고 하면 그 친구의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했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고저가 있긴 해도 비슷할꺼다. 표현하지 않는다고해서 못 느끼는 건 아닐텐데 일본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걸 어려워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건 더 더욱 싫어한다. 그래서 그렇게 참다가 표현하는 방법이 증발이 아닐까. 슬픔을 표현할 수도, 분노를 표출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에겐 어쩜 증발은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매년 10만 명의 일본인들이 증발한다고 한다. 빚, 실직, 이혼, 낙방 등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현실을 등지는 것이다. 자신의 흔적을 지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프랑스 저널리스트 레나 모제와 그녀의 남편인 스테판 르멜이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다. 부부는 5년 동안 일본을 다니며 증발한 사람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만났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일본에서 낯익은 우리의 모습을 만나는 것만 같다.
일본 사회가 실패에 관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패는 개인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의무와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라고 한다. 실패하는 것으로부터 배움이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아닌 수치심의 무덤일 뿐이다. 화려한 경제 발전이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든 일본에서 기업들은 좋은 직원이 되기를 기대하고 세뇌시켜놓고 더 이상 필요 없으면 다 쓴 휴지처럼 버린다고 한다. 이건 일본의 기업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늘 그랬으니까... 쓸모없어진 사람들은 다시 일어서기를 준비하거나, 자살하거나,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영원히 타인으로 사는 것을 선택한다.
능력있는 영업사원이었던 덴지가 있다. 판매 실적도 좋아 팀장으로도 승진했다. 일이 너무 많아 사무실에서 잠을 잘 정도로 열심이었던 그가 심한 폐렴으로 입원했다가 복귀하니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었고 그의 짐은 상자 속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집에서는 아무것도 모른채 매일 아침 출근하는 남편을, 아빠를 배웅했다. 그리고 인출할 수 있는 돈을 모두 꺼낸 뒤 자취를 감춰버렸다고 한다. 이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열심히 일했는데 회사에서 내팽겨친 것에 대해 억울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와 아들은 어쩌란 말인가. 위로를 할 기회도, 다시 시작해보자고 기운을 북돋아 줄 기회조차 없었다. 가족에게도 솔직하지 못하고,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말 그대로 자기가 너무 힘들어서 가족을 버린거다. 남편이, 아빠가 어서 퇴근해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기대했을 사람들에겐 너무 잔인한 일이다. 증발하거나 자살한 사람을 가족으로 둔 사람에겐 평생 그 꼬리표가 따라다닌다고 한다. 당장 먹고 살 일도 걱정이겠지만 버려졌다는 슬픔과 분노보다 크지는 않을 것 같다. 내 일도 아닌데 너무 화가 났다. 평생 함께 하기로 약속한 사람에겐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닌가.
다른 점이 많은 일본이지만 또 같은 아시아권으로 비슷한 점도 많은 일본이다. <인간증발>을 읽으며 일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오늘도 사라진 남자친구를 찾는다는 글을 읽었다. 각종 신분증 등은 두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걱정하는 여자친구의 글이었다. 요즘 들어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자주 보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평범한 얼굴들이다. 어떤 힘든 일로 증발을 선택한지는 알 수 없다. 어떤 결심을 하고 사라진지는 알 수 없지만 말해주고싶다. 아직도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힘이 되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그래서 돌아오라고...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은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사회를 벗어난 우리는 이미 한 번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서서히 자살해가는 셈이죠." p.85
"가족과 지인들은 사회에서 도망치는 것을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본 사회는 실패에 관대하지 않습니다. 실패는 개인이 사회에서 해야 할 의무와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죠."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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