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거라고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두께를 떠나서 책이 주는 이야기 때문에 쉽사리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었다. 읽다가 힘겨워서 계속 덮을 수밖에...
법에는 '근인'이라는 원칙이 있다고 한다. 헬렌 팔스그래프는 애들을 데리고 해변으로 가기 위해 열차 플랫폼에 서있다. 플랫폼 맞은편에는 한 남자가 출발 중인 열차를 잡으려고 급히 뛰고 있었다. 이미 출발한 기차를 따라잡기 위해 그는 뛰었고 기차 승무원은 손을 뻗어 그 남자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플랫폼에 있던 짐꾼이 뒤에서 그를 밀어주어 무사히 기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의 짐이 떨어졌다. 짐은 떨어지면서 폭발했다. 그 안에 폭죽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고, 기차 반대편 플랫폼에 가방 무게를 재느라 설치해둔 거대한 금속 저울은 필스그래프 부인에게 떨어졌다. 그녀는 회복한 후에 부상의 책임을 묻고자 철도회사에 소송을 걸었다. 무엇이 그녀의 부상을 초래했을까? 작다고도 생각할 수 있었던 모든 이유들이 원인이었다. 근인이란 법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원인이다. 원인이 정해져야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물을 수 있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리키 랭글리라는 이름을 가진 20대의 남자가 같은 마을에 사는 어린 남자아이를 살해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리키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형에 관한 꿈을 꾼다. 그 어린 남자아이는 리키의 꿈에서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힌다. 그 영향 때문인지 6살 정도의 금발 머리 남자아이에게 성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리키는 자신의 이런 성향이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시설에 도움을 피하지만 그의 노력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리키는 아동 성추행으로 징역을 산다. 그 후 멀리 떨어진 어느 마을에 정착하지만 그의 형과 비슷한 모습을 한 남자아이 제레미를 결국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 살해한다. 리키는 자신의 형이 떠올라 제레미를 목 졸랐다고 하지만 제레미의 옷에서 리키의 정액이 발견되어 성추행 여부로 추궁 받는다.
저자는 하버드 법대 재학 당시 로펌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막 재심을 끝낸 남자의 자백 동영상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어린 시절 친할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 사실을 알고도 침묵해버렸다. 각종 가족 행사에 할아버지를 초대했고, 저자는 그 상황을 조용히 참아야 했다. 그녀의 끔찍한 기억이 한 남자의 동영상 때문에 되살아났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었다. 리키의 어린 시절을 추적하고, 리키를 면회한다. 그리고 그의 재판도 취재한다. 제레미의 엄마 로렐라이는 리키도 하나의 인격으로 함부로 죽일 수 없다고 한다. 리키는 어떤 사람일까? 정말 평생토록 자신의 형제인 오스카의 악몽에서 달아나고자 한 사람일까? 아니면 그저 아동 성도착증 환자일까? 그렇다면 왜 그는 그런 선택들을 하게 된 걸까?
나중에 우리 부모님이 마주한 선택도(이것 때문에 나는 리키의 이야기에 이끌렸다) 어떤 면에서 보면 같았다. 아버지의 분노와 우울을 묻어버리고, 할아버지의 학대라는 사실을 묻어버리고ㅡ 심지어 할아버지가 저지른 행동에 대한 내 분노를 묻어버리고, 그것이 올바른 처사가 아니란 걸 인정해야 한다는 내 주장도 묻어버리는 등, 이런 위협거리를 묻어버리는 게 비교적 더 쉬웠을 것이다. 부모님은 계속 살아가야 했으니까.
- 중략 -
부모님은 행복한 가정을 일궜고 이웃들도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도록 과시했다. 여름에는 섬으로 가서 지냈고 크리스마스는 트리 아래서 지냈으며 저녁에는 우리 여섯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부모님은 술잔을 들어 행운을 빌었다. 가정마다 나름대로 특징적인 행동, 특징적인 믿음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부모님의 믿음이라고 알고 있던 것은 '뒤돌아보지 마라'였다. (p.p. 443~444)
이 책은 실제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그러나 정교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더 읽기가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 속 이야기는 결코 누군가의 상상이 아니었다. 저자는 할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제레미는 리키 랭글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가난한 싱글 맘과 함께 사는 여섯 살 제레미. 제레미는 밤톨군과 동갑이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삶을 다 살아보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 죽는다. 만약에 내가 이런 상황에 있었다면... 절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지만 마음이 아파졌다. 그래서 로렐라이가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내 자녀의 살인범의 이야기를 들을 만큼 나는 아량이 넓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그 인간을 끝내지 못하는 것에 더 안타까워할 것 같다. 지금은 힘겹지만 어쨌든 이 책은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이야기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래서 내 맘이 언젠가는 가벼워질 것이다. 내 삶과 공통점이 없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저자는 10년 동안이나 이 이야기를 적어내려왔다. 그녀는 이렇게라도 그녀의 할아버지와 리키를 이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