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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김신회 지음 / 놀 / 2018년 9월
평점 :

요즘 뭐 해? 지금 뭐 해?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안 해'라고 대답하기 힘들어진다.
덜컥 무기한 휴가가 주어졌지만 나는 쉬는 법을 몰랐다. 성과는 없어도 끊임없이 움직여대던 일 중독자였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데도 이러고 있는 내 모습에 죄책감과 자괴감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라는 실감이 들 때마다 어딘가에서 들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쉬는 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무 죄책감 없이 쉬는 게 어려운 것이다.' (p.5)
열심히 살아도 부족한 세상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란 힘든 일이다. 밤새 밤톨군에게 지치고 유치원에 보낸 후 낮잠을 잘 때조차 게으른 사람이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까 잘 좀 자자! 쫌!!) 회사에 간 꺽정씨가 "뭐 해? 점심 먹었어?"라고 전화라도 오면 머뭇거려진다. 우리 식구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나도 그만큼 열심히 산다는 걸 보여줘야만 할 것 같다. 손목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좀 쉬라고 하던데, 그건 또 어떻게 하는 건지... 열심히 살지도 않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것도 방법을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나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은 나다. 그 마음은 내가 나한테 품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러니 이제는 누가 나에게 간섭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저 이 말을 떠올린다.
'나는 당신이 아니랍니다.' (p.21)
역지사지.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여 보다.
저자의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 "내가 너라면 그렇게 안 할 텐데." 그 말은 나 역시 엄마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여기에 엄마는 "나도 나 같은 엄마가 있었다면 훨씬 잘 되었을 텐데..."라며 엄마가 좋은 엄마라고 강요한다. 순종적인 성향이 강한 엄마에겐 좀 더 강하게 미래를 제시해주는 엄마를 만났다면 좋은 결과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반항적 기질이 강한 나에겐 엄마가 짠 미래는 마음에 든 적이 별로 없었다. 마음에 들었을 때도 엄마가 정해놓은 게 싫어서 무턱대로 거부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엄마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다는 게 가끔은 억울하다. 내가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내 마음은 상관없이 답만 찾으려고 하는 엄마가 못마땅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엄마와 내가 다른 사람이란 걸 언제쯤 인정해줄까? 애증의 관계는 언제쯤 마무리가 될까? 엄마가 꼭 딸을 사랑만 하는 것도 아니고, 딸도 엄마를 애틋하게만 생각하지도 않아도 되는 관계가 되고 싶다. 그저 사람과 사람으로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는, 때로는 무심한 관계이고 싶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줄기차게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에 대해 모른다.
정체성은 우겨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묻어나는 것이다. (p.204)
얼마 전에 자녀 관련 강연을 듣고 왔다. 남자아이 미술 교육으로 유명한 최민준 대표님의 강연 중에 기억이 남는 말이 있다. 남자아이들은 자신들이 상어라고 생각한단다.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놀리고, 싸우고, 장난을 친다고 한다. 엄마들은 사고뭉치들이 힘겨워서 '이것 하지 마! 저것 하지 마!'라고 하는데 그건 상어인 아이들에게 어항 속 금붕어처럼 살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단다. 멋진 지느러미를 뽐내고 뾰족한 이빨을 보이며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고래처럼 등장만으로도 존재감이 있는 멋진 사람이 되어라고 조언해주라고 하셨다. 사실 남자아이들뿐만 아니라 주변에 상어떼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도 상어 같은 사람은 아니었을까? 알아봐달라고, 나라는 사람이 있다고 뾰족 거리며 날 세울 때가 얼마나 많았나 생각해본다. 조금은 무던한 그리고 너그러운 고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꿈을 꿔본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뭔가를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불안해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또 무언가를 시작하면 완벽해야 한다고 질책하겠지만...) 작가의 이야기에 내 일기가 아닐까 싶은 부분도 꽤 많았다. 저자는 마음이 힘들 때 읽는 책이 '자기 계발서'라고 하던데 나에겐 에세이가 그런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