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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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남한산성에서 침묵을 지켰던 사람들. 나는 그들이 하고자 했던 말이 궁금합니다.

십년 전 남한산성이 처음 발매되었을 때 김훈 선생님은 낮은 목소리 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김훈 선생님의 강연을 직접 듣는다는 흥분에 젖어있던 나는 김훈 선생님의 그 말씀에 속으로 이렇게 답했다.

그들은 아마 비겁자들이거나 아주 멍청한 자들일거에요. 용기가 없어 침묵을 지켰거나 그 상황에서 제가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몰랐을테죠.

그렇게 답하는 나는 아주 자신만만했다. 그때 나는 펄펄하게 기운이 넘치는 스물 일곱이었기 때문에. 입이 있는 자가 왜 제 할 말을 못한단 말인가. 그런 비겁함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제가 할 말을 고르지도 못하는 자들을 경멸했었다. 그때의 나는 오로지 김상헌과 최명길이 내뱉는 말의 우뚝함과 곡진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떤 말을 취할 것인가. 그리고 또 어떤 말을 버릴 것인가. 나는 딱히 어느쪽의 말을 취하지도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하는 자신의 우둔함에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그들의 그 말들을 취하거나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산성에서 침묵을 지켰던 자들이 누구였는지 알 것 같다. 그들은 비겁한 자들도 아둔한 자들도 아니었다. 침묵을 지킨 자들은 성첩을 지키던 군병들, 살고 있던 초가집이 헐리고 얼마 안되는 곡식을 징발당해야 했던 성안의 양민들이었다. 그들은 조정에서 뒤엉키는 그 어지러운 말들의 허망함을 알고 있었다. 그 말들이 무엇을 바꿀 것인가. 그 말들이 그들의 살길을 열어줄 것인가. 말들이 난무할때 군병들은 성첩에서 비를 맞아 젖고 얼어죽어가고 있었지만 말은 얼어죽어가는 이의 체온을 데울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말을 의지대로 온전히 내뱉었던 이는 나루의 아비인 뱃사공이었다. 그러나 김상헌은 사공이 말을 마치는 순간 그대로 칼을 휘둘러 사공의 목을 베어버린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성안에서 도리를 말하고 우뚝한 뜻을 내세우며 말의 힘에 취한다. 그는 사공의 입을 막았다. 사공은 그저 제 살던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했을 뿐이었다.

이제 나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여전히 세상에는 수많은 말이 떠돌고 수많은 말이 날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흰 눈밭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던 뱃사공을 떠올린다. 그는 단지 제 살던 자리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건 그 세상에서는 말해져서는 안될, 말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그래서 말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뱉었던 뱃사공의 말을 떠올리면 가슴이 시리고 뼈가 져리다. 나는 김상헌이나 최명길의 말을 취하거나 버려야 하는 입장에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아둔해서가 아니라 나 역시 성첩에서 얼어죽고 ,살던 초가집의 지붕이 헐리고 ,생계를 잇기 위해 고이 간직했던 한줌의 곡식을 나라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빼앗기고 ,제 살 곳으로 가겠다는 그 한 마디에 목이 베이던 그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 십년 전의 나는 그걸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었다. 비겁하고 멍청한 자는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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