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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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초반에 대학원에 진학할때까지만 해도 나는 야심만만했다. 고된 밥벌이에서 벗어나 다시 학생이 되어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게 되다니. 드디어 내 진짜 인생이 시작된 것 같았다.
졸업을 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나는 그 야심만만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삼십대 중반,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우쭐하기도 했다. 다수가 가는 길이 아니라 오직 나만이 갈 수 있는 길을 가리라 다짐하면서 친구들과는 조금쯤 달라진 길을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대견해 했다.
그리고 마흔을 앞둔 삼십대 후반의 나는 그렇게나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던 과외일을 다시 하고 있다.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초등학교 학생들 아니면 그 학생들의 어머님뿐. 일하는 곳은 강남의 고급 아파트촌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 변두리의 작은 원룸이다. 집이 너무 좁아 식사후에 제대로 움직이질 못해 살이 20킬로그램이나 쪘지만 공부방이 작다고 푸념하는 학생들에게 최대한 우아한 미소를 짓는다.
간만에 과외수업이 일찍 끝난 어느 비오는 날,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백화점 지하식품 매장 구석에 있는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이 책을 읽었다.

고급 레스토랑이 특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특별한 이벤트가 되는 사람도 있다. 뭘까 이 거리는p.15

쓰치다의 이 말을 읽는 순간 울컥 눈물이 터졌다. 이 무슨 주책인가 싶어 황급히 눈물을 닦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쓰치다는 무척 성실하다. 꾀부리는 일 없이, 누가 알아봐주지 않아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다. 직장 동료에게 늘 상냥하고 배려하고 마음을 쓴다. 그런 그의 마음에 가늘고 긴 상체기를 내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그 간극, 그 거리다
.
이게 뭐야, 왜 이래야 해? 무서워. 아, 무서워.

누가 볼새라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옹송그리고 앉아 나는 눈물을 쏟아냈다. 꿈과는 영 거리가 먼 지금 내가 하는 일. 아무리 일을 해도 벗어날 수가 없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불 꺼진 좁은 원룸. 그 모든 사실이 한순간에 나를 덮쳐왔고 나는 소리를 죽이며 꺽꺽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라는 건 결국 더운 여름날 에어컨 바람을 쐬며 마시는 뜨거운 커피 한 잔 뿐.

겨우 울음을 그치고 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 마저 책을 읽었다. 쓰치다의 삶을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치다는 한걸음 한걸음 나아 간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어린이책 코너의 배치를 고민하고 작은 구연동화 시간을 마련한다.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자신을 이해해주는 따뜻한 사람을 연인으로 맞아들인다.
그의 우주는 넓고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그 우주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우주를 향해 걸어간다. 그는 의심하지만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 우주가 오롯이 자신이 지켜야 할 세계임을 받아들인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얼마남지 않은 마흔 이후를 떠올려 보았다. 캄캄했다. 그곳은 너무나 먼 우주여서 나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나는 다시 오늘 마셨던 뜨거운 커피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커피를 마시는 일이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호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 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하자. 지금 이곳이 나의 우주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그리고 걸어가자. 이 우주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조급해 하지말고 차분히 걸어가자. 두려움이 밀려들때는 혀끝에 맴도는 뜨거운 커피의 향을 기억하며 걸어보자. 걷다보면 나는 또 저만치 가 있겠지.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그처럼. 쓰치다처럼.

생각을 마친 나는 내일의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그러니 걸어가자. 한걸음, 한걸음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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