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야, 이 씨발놈들아. 니들만 살자고 물을 남의 동네로 밀어붙여! 물은 고루 퍼져야 하는 거야.(p.11)



 작년 가을에, 나는 하던 일을 작파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일을 그만두면서 나는 눈앞의 세상을 향해 외쳤다. 야! 이 인간들아, 이 인간들아! 그렇게 사니 좋으냐? 비명소리와도 같은 이 한 문장을 내뱉는 순간 눈앞이 흐려지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 인간들아.....를 입 안 가득 베어물고 시골로 내려가는 내 발걸음은 더듬거렸다.

 추수가 끝난 빈 논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물 빠진 저수지 바닥에서 꿈틀대는 붕어처럼 나는 마른입을 뻐끔거리며 거품처럼 흰 입김만 쏟아냈다. 내가 쏟아낸 입김이 노을에 버무려진 공기속에서 흩어졌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연필깎이 칼을 손목에 찔러넣었다. 칼이 손목에 파고들때, 칼끝에 와닿은 피부의 감촉은 질겼다.


 

 니미, 농부가 무슨 죄가 있어서 벼락을 맞는가. 야, 별거 아냐. 일 단만 쓰자. 서너 줄만 보내.(p.137)




 그날 밤 팔뚝에 링겔을 꽂고 응급실에 누워있던 내 옆에 세 명의 인간이 더 들어와 누웠다. 도대체 약을 얼마나 먹은 거냐고 추궁하는 의사에게 약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어눌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중년의 여자는 바지에 똥을 지리고 있었다. 악취를 풍기는 여자 옆에서 함께 실려온 할머니가 약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 농약을 먹고 누운 남자를 붙들고 젊은 여자가 통곡을 쏟아냈다. 의사와 간호사가 다가가 여자를 남자에게서 떼어내고 남자가 누운 침상 주변에 커튼을 둘러쳤다. 응급실 안을 메우는 악취를 뚫고 여자의 울음은 길게 이어졌다. 악취속에 누워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칼 끝에 와 닿던 질긴 감촉에 대해 생각했다. 고작 연필깎는 칼 따위로 이 질기디 질긴 것을 베어낼 수 있다 여겼다니. 인간아, 이 인간아. 나는 피식 피식 웃음을 흘리며 인간아, 를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인간아, 이 인간아.



 물은 고루 퍼진다. 물이 퍼지는 법칙은 단순하고 간명하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퍼진다. 물은 결코 개인의 사정을 봐 가며 흐르거나 퍼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물의 무자비한 공평함이고 잔혹한 정의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인간의 살아가는 세상의 법칙일 것이다.

 소설속에서 김훈은 어떠한 희망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에 대해 말할 뿐이다. 김훈은 물은 고루 퍼져야 한다고 외치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그러다 박터지는 인간에 대해서 말한다. 평화로울 수 있는 세상은 다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고운 뼈만 남은 폐허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세상은 이미 흘러간 세상이다. 인간은 결코 흘러간 세상에서 현재를 살 수가 없다.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은 말한다.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인간아, 강을 건너지 말라, 고. 강을 건너지 마라. 네가 어디로 갈 것이냐. 어디로 갈 것이냐고. 강 저편은 무한궤도에 깔려 으스러진 후에야 갈 수 있는 곳이라고. 그러고 난 후에 남은 자들은 슬픔도 안타까움도 아닌 다만 냉정한 정치의 언어로 너의 죽음을 포장할 것이라고.


 김훈은 연민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어떠한 가치판단도 불가능한 뒤섞인 세상을 펼쳐보일 뿐이다. 참혹함은 그저 참혹함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이 만류하면 듣고 싶어진다. 인간아, 강을 건너지 마라. 네가 어디로 갈 것이냐, 어디로 갈 것이냐고. 어떠한 희망보다도, 너무나 참혹하여 눈을 돌릴 수 조차 없는 김훈의 그 솔직함이 내게는 위로가 된다.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강 이편에서 살아가야 한다. 




서북경찰서 야간 당직사건 중에는 기삿거리가 없었다.(P.324)



 시골에서 가을과 겨울을 지나고 난 후 나는 다시 내 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내 자리로 돌아와 바라보는 눈 앞의 세상은 여전하다.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 없음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아무데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