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마이너스
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손아람 장편소설,『디 마이너스』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디 마이너스』는 사회 소설이다. 하지만 모든 사건과 이야기가 주인공인 태의의 눈과 귀와 입으로부터 나온다. 미시적인 이야기다. 아주 미시적으로, 거대한 국가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이 책에 녹아있는 날카로운 유머다. 나도 인문학도다. 아니, 인문학도였다. 인문학도들이 사용하는 '우아한 논법'을 나는 잘 안다. 때로는 그 수려한 말빨에 질리기도 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시니컬함과 각자의 철학이 좋다. 책으로만 읽고 있어도, 이 주인공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말하는지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 날카로움까지도.


날카로움이 돋보이는 부분을 몇몇 소개한다.


<권력> 中

미학과에서 농활을 왔다. 겨우 마흔 명 남짓한 작은 농촌 마을이었다. 그곳에, 경수의 아버지가 방문했다. 그는 경기도 도지사였다. 마흔 명의 사람들이 잔뜩 긴장을 했고,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노릇하게 익어가고 있는 소고기가 신경 쓰였다. 왜 그 얄미운 인간을 위해 한우를 세 근이나 준비했단 말인가. 그걸로 도지사를 사흘 동안 배 터지게 먹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지사를 언제 다시 본다고. 그게 바로 권력의 문제였다. 세상의 모든 지점에 무차별적으로 작용한다는 것. 권력은 혼자 높지 않고 다른 곳을 낮게 패어낸다."


<해결방법1> 中

태의는 대석 형을 따라 대우 자동차 김우중의 자택에 침입힌다. 대우 자동차는 낭떠러지 끝에서 회사를 매각하기 위해 정리해고를 감행했다. 김우중의 자택에 침입한 젊은이들은 김우중 구속, 도피 재산 환수, 구조조정 저지를 외친다. 이 때, 대석 형이 나섰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보트에서 뛰어내려야 하지 않겠냐고. 제가 의아한 건, 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장롱에 침대까지 챙겨 들고 보트에 탔느냐는 것입니다!"


<자유시장1> 中

대학에도 신자유주의가 불어닥쳤다. 이제는 학생도 교수의 강의 내용을 평가하게 되었다. 그 성적에 따라 교수는 재임용 여부가 갈리게 될 것이었다. '띄엄띄엄의 철학자' 강정환 교수는 꼴찌를 했다. 강정환 교수는 낭만적이고 현실에 발내리지 않은 듯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뽑혔을 때 새 시대를 기뻐하는 의미에서 모든 수강생에게 A+를 뿌렸다. (뿌린다는 은어적 표현을 즐겨쓴다) 수업에 참가하지 않아도, 집회가 있었다고 하면 유일하게 받아주는 교수였다. 하지만 그런 강정환 교수가 교수 평가 제도에서 서울대학교 전체 꼴찌를 차지했다. 그 결과, 강정환 교수는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띄엄띄엄한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슬픈 일이다. "그 학기가 끝나고 강정환 교수는 우리 가운데 누군가에게 꼴등을 안겼다. 우리가 그에게 꼴등을 안겼듯이. 그게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었다.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 세상이었다. 세상은 꾸준히 나빠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좋았던 시절만을 회상하고 있다."


<자유시장2> 中

"자유시장의 권리는 서로 다른 크기를 갖는다. 매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통용되는 자유의 개념에는 서로 다른 자유가 상충할 때 더 크고 강한 자유가 승리를 거둘 자유가 된다. 반면 민주적 권리는 모두 크기가 같다. 매매할 수가 없다. 불가침이다. 민주주의는 비키니를 입은 관광객과 비키니를 입은 성노동자에게 똑같은 만큼을 준다. 한 표씩만을. 그것은 민주적인 동시에 반자유적이다. 여전히 인류가 풀지 못한 자유의 딜레마. 소수가 독점할 자유가 보장되는 곳을 자유 사회라 불러야 하는가? 모두에게 공평한 자유가 강제되는 곳은 반자유 사회라 불러야 하는가?"


손아람 작가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결코 소설이 아니다"라고 썼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이 이야기의 시대를 살았든 살지 않았든, 혹은 살았어도 눈이 먼 채로 살았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하고 똑바로 바라봐야 할 이야기다. 독재와 국가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사라졌다고 낙관하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독재와 국가 폭력에 신음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젊은 이들은 끊임없이 싸웠고, 왜 싸워야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왜 싸우고 있나. 누군가는 그것이 젊음의 패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패기 때문이 아니다. 예민함 때문이다. 다치기 쉬운 양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차마 안 보인다고 말할 수 없는, 청춘이다.


이 책을 읽다가 10년이 흘렀다. 10년의 한국 역사가 흘렀지만, 부조리는 여전했다. 야구방망이를 들고, 화염병을 들고, 스피커를 들고 시위하며 싸우던 작중 인물들은, 그 새 이 사회에 '적응'했다. 태의는 변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싸웠던 걸까. 우리가 맞서싸운 '세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나? 우리가 '적'이라고 불렀던 것은 정말 적이었을까?   "나는 환멸을 느끼지 않았다. 이미 세상의 부조리에 무감각해졌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자본의 논리라고 불렀지만 나는 다윈이 사용한 단어가 더 와 닿는다. 다윈은 그것을 적응이라고 불렀다." 그 와중에 변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진우와 수리다. 어딘가 조금은 모자라고 부족했던 이 커플이 모두가 떠나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진우는 우리 정파가 아니라 운동권의 미래를 어깨에 걸머졌다. 전우들은 싹 전멸하거나 전장 바깥으로 달아났고, 어둑한 PC방에서 밤새워 스타크래프트 하길 즐기던 창백한 얼굴의 공대생 한 명이 홀로 남았다. 그렇게 모두에게 잊힌 채로 그는 외로운 걸음을 뚜벅뚜벅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간 모든 일, 그 모든 일이 진우라는 상속인 한 명을 키워내기 위한 거대한 시험이었던 셈이다. 오직 진우만이 그 시험을 통과했다. 오직 진우만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