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70
김교빈.이현구 지음 / 동녘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공자(孔子) 사후 100년이 지나 맹자(孟子)가 태어났고, 그 후 다시 90년이 지나 순자(荀子)가 태어났다. 서양철학의 계보를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양사상의 맥을 공자-맹자-순자에서 찾아도 무방할 것이다.

김교빈 교수는 ‘사람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하는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과연 어떤가.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혹은 선하다 악하다고 이분화하여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인간을 오해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좀처럼 즉답하기 어려웠다.

흔히 성선설의 주창자로 맹자를, 성악설의 주창자로 순자를 들지만, 두 사람이 말하는 본성의 개념과 선악의 규정이 서로 차이가 있다고 김교빈 교수는 설명했다. 맹자는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본성을, 순자는 생리적인 차원에서의 본성을 말했다는 것이다.

▪유자입정(孺子入井) (<맹자>공손추 장구 상)
어린 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지는 것을 본다면 그 순간 깜짝 놀라 측은해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는 어린 아이의 부모와 사귀기 위해서도 아니고 이웃이나 벗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도 아니며 아이의 위기를 외면했다는 원성을 듣기 싫어서도 아니다. 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이다.

맹자는 우물가의 어린 아이를 비유로 들어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을 초월해 존재하는 타고난 마음을 선(善)으로 설명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잘 기르면 인(仁)하게 되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잘 기르면 의(義)롭게 되고, 사양지심(辭讓之心)을 잘 기르면 예(禮)를 갖추게 되며,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잘 기르면 지(智)의 덕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맹자>양혜왕 장구 상에 보면, 맹자가 제선왕과 나누는 대화에서 “항산(일정한 재산, 생업)이 없는 사람은 항심(늘 지니고 있는 떳떳한 마음)이 없다. 항심이 없으면 방탕하거나 편벽되고 사악해지게 되는데 백성들이 죄를 저지른 다음에 처벌하는 것은 그물로 새를 잡는 것과 같다.”라고 하며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입어 항산을 유지할 수 있게 해야 어진 임금이라고 설파한다. 이것이 유명한 항산항심(恒産恒心)이다.

그러나 맹자는 덧붙여 이런 말도 한다. “항산이 없어도 항심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오직 선비만 그렇게 할 수 있다(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이렇게 맹자는 군자의 본성과 소인의 본성을 구분하여 설명했다. 전국시대의 지식인이었던 맹자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몸을 수고롭게 하는 자와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자로 철저하게 나누어진 사회를 이야기한 것이다.

▪정리평치(正理平治) 

그렇다면 전국시대 말 중원천지가 통일기운에 쌓여있을 때 태어난 순자(荀子)의 사상은 어떠했을까? 같은 유가(儒家)의 맥을 잇고 있지만 순자는 맹자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한다. 맹자가 내면적 도덕질서를 선이라고 규정했다면, 순자는 현실적으로 혼란스러운 사회가 질서 잡힌 상태, 즉 바르고 이치에 맞고 태평하며 잘 다스려진 상태가 되는 것을 선(善)이라고 했다. 所謂善者 正理平治也
 

순자는 인간의 마음 작용을 성(性)-정(情)-려(慮)-위(僞)의 4단계로 설명하였다. 쉽게 말해 생리적인 본성-감정-판단-실천의 단계로 마음을 설명하면서 그가 강조한 바는 ‘인간의 의지에 따른 실천’이다. 
 

특히 공자와 맹자 시대까지 천(天)과 인(人)을 하나로 보던 틀에서 벗어나 천(天)으로 대변되던 숙명을 부정하고 자연과 인간을 구분해서 생각했다는 것은 순자 철학이 주는 중요한 시사점이다. ‘사람은 자연을 이겨야 한다(人定勝天)’는 사상은 가히 프로메테우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문정신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공자나 맹자에 비해 순자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김교빈 교수는 지적했다. 순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가 더 관념적인 풍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성악설을 주장했다는 말이 주는 편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구절을 되새겨보았다. 흔히 선생을 능가하는 뛰어난 제자를 이르는 말로 쓰이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다.

學不可以已 靑取之於藍而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청색은 쪽 풀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쪽 풀처럼 거친 것이지만 학문으로 수양을 하다보면 고운 푸른색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맹자가 말한 군자의 본성이라는 경지도 결국 순자가 말한 쪽 풀에서 뽑아낸 푸른빛(靑出於藍)의 경지와 같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맹자와 순자가 광화문에서 만난다면 성선 성악을 두고 논쟁을 할까? 아니면 뭐 그게 바로 그거지요하며 차나 한잔 하러 갈까? 여하튼 예(禮)에 벗어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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