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연금술사 26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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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등가교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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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E1(투애니원) - 1집 To Anyone - 포토북(48p)
투애니원 (2NE1) 노래 / YG 엔터테인먼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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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빅뱅이 처음 나왔을때 남자지만.. 좋아했다. 그들의 10대와 20대를 제대로 겨냥한 노래들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2ne1이 더 좋다. 물론 남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들의 거침없음. 인터뷰를 할땐 정석처럼 잘 이끌어 가는 게 아닌, 뭔가 있는 것 같은 톡톡튀는 음악과 춤을 보여주는 여성 그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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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배트 1
우라사와 나오키 글.그림, 나가사키 다카시 스토리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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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도 예술임을 알려주는 서사적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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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0-03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라 나오키 옹의 신작이군요

라몬 2010-10-03 11:48   좋아요 0 | URL
ㅋㅋ 최강작가중 한명

다이조부 2010-10-03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퓨터 상에서 혹시 windows 가상 메모리 부족 이라는 메시지가

자주 뜨고,

컴퓨텨가 파란화면이 나오면서 다운되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네요 --

혹시 해결책 아시면 조언좀 부탁합니다

라몬 2010-10-06 19:11   좋아요 0 | URL
죄송 컴맹이라..ㅡ.ㅡ;
 
B급좌파 : 세 번째 이야기
김규항 지음 / 리더스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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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한겨레칼럼으로 촉발된 김규항,진중권 논쟁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김규항 한겨레 칼럼.

[  


야!한국사회] 오류와 희망 / 김규항 

진보신당의 지방선거 결과는 참담하다. 노회찬씨가 3% 남짓의 표를 얻고 심상정씨는 아예 선거 직전 사퇴했다. 두 사람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했지만 이번보다는 나았다. 진보신당의 사정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대체 왜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에 있다고 본다. 물론 모든 정치는 대중성이 중요하며 분당을 통해 만들어진 진보신당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진보신당의 대중성은 진보정당으로서 최소한의 정체성을 지키는 한도 안에서만 중요하다. 그걸 넘어서버리면, 다시 말해서 당장의 대중적 호응에 집착해 자유주의적 의제에 몰입해버리면 대중들은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이유’를 잃게 된다.
한나라당 같은 극우정당 혹은 민주당·국민참여당 같은 자유주의 정당은 애써 그 정체성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두 세력은 이미 반세기 이상 독재/반독재 혹은 여야로 존재해왔고 대중들은 어쨌거나 그 정체성에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그 정체성을 대중에게 처음부터 설명해야 한다. 자신들의 정치가 기존의 반독재/민주세력과 어떻게 다른지를, 굳이 자유주의 정치가 아니라 진보정치여야 하는 이유를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기존의 구도가 몸에 밴 대중들은 당선 가능성도 적은 그들을 굳이 지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좋은 뜻에서든 나쁜 뜻에서든 많은 사람들은 완주한 노회찬씨는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켰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노회찬씨 역시 제 정체성을 지켰다고 하긴 어렵다. 이를테면 선거 직전에 열린 그의 인터넷 토론은 시종 오세훈 조롱 경연으로 일관했다. 오세훈을 막는 게 그리 전적으로 중요하다면 당연히 한명숙을 찍어야 한다는 말 아닌가?

그 토론은 ‘한명숙이 아니라 굳이 노회찬이어야 하는 이유’에 집중되어야 했다. “반이명박 반이명박 하는데 당신들 집권했을 때 서민과 노동자 입장에서 이명박과 뭐 그리 달랐습니까?” “부자정권 비판하는 당신들은 삼성공화국 만들지 않았습니까?” “새만금 삽질한 사람들이 4대강 삽질 욕해도 되는 겁니까?” 등등으로 말이다.

그 에피소드는 대중성 강박에 빠진 진보신당이 보여온 무수한 프레임 오류 가운데 한 예일 뿐이다. 심지어 진보신당은 진중권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 같은 그룹을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이라도 되는 양 마구잡이로 조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자유주의자들이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지만,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은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2008년 11월 노무현씨가 “한-미 에프티에이 재협상을 준비할 때”라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자, 심상정씨가 “민초들이 노 전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건 이명박 정권에 대한 ‘재협상’ 훈수가 아닌 한-미 에프티에이 체결에 대한 고해성사”라는 글을 올리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노무현씨의 중단으로 논쟁이 끝까지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론 진보신당 역사에서 그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또렷한, 아니 거의 유일한 사건이었다.

바로 그런 사건이, 극우와의 싸움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과의 경쟁이 진보신당의 주요하고 일상적인 활동이 될 때 비로소 대중들이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이유’가 생겨난다. 그렇게만 된다면 진보신당은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보신당엔 자유주의를 진보정치라 강변하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 사민주의적 전망으로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당원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이 한겨레 칼럼에 쓴 글은 자유주의자들과 확실한 구별을 통한 선명한 진보신당의 방향성찾기인거 같네요. 이책에 나오는 <조갑제와 강준만>이라는 글에서도 확실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위의글에서 노린 바로 그 자유주의자는 진중권이구요. 아래의 글은 김규항의 한겨레 글에 씨네21에 진중권이 반박한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중권의  글>




진중권의 아이콘] 유물론적 신학에 관하여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 2010.07.23 
 
유토피아와 좌파 바바리맨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읽다가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을 만났다. 신학과 유물론의 모순적 결합을 지젝은 이렇게 정당화한다. “데리다는 (…) 오늘날에는 오직 무신론자들만이 기도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수사법에 반하여 우리는 신학자들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유물론자라는 라캉의 주장이 가진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 이 역설은 일상적인 것이다. 사실 돈의 전능을 인정하는 강남 부자 교회의 목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유물론자이며,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믿는 좌파들이야말로 진정한 관념론자가 아닌가.

하지만 이 흥미로운 모순의 저작권은 사실 지젝이 아니라 발터 베냐민에게 돌아간다. 흔히 ‘역사철학테제’라 불리는 베냐민의 에세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는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분분한 해석을 낳는 베냐민 특유의 알레고리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파울 클레의 그림과 함께 등장하는 우울한 역사의 천사, ‘앙겔루스 노부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또 아리송한 것이 바로 ‘역사철학테제’의 서두에 등장하는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다.

유토피아적 발상에 대한 역설
“널리 알려지기를 상대가 수를 두면 맞수를 두어 늘 승리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인형이 있었다. 터키 옷을 입고 입에 수연(水煙) 파이프를 문 인형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인 체스판 앞에 앉아 있다. 테이블은 거울 시스템을 이용하여 안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 안에 체스에 능한 등 굽은 난쟁이가 들어앉아 끈으로 인형의 손을 조정하고 있다. 철학에서도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적 유물론’이라 부르는 인형은 늘 승리해야 한다. 그 누구와도 싸워서 이기려면 그것은 신학의 힘을 빌려야 하나 오늘날 신학은 왜소하고 추해져서 들여다보여서는 안된다.”

그 난쟁이의 이름을 베냐민은 ‘신학’이라 부른다. 그 누구와도 싸워 이기기 위해 과학적 유물론은 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단다. 이게 무슨 뜻일까? 지젝의 책에서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과 마주치는 순간, 불현듯 내가 5, 6년 전에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자기 인용을 통해 그리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알레고리에서 등 굽은 난쟁이, 즉 ‘신학’은 곧 유토피아의 철학을 가리킨다. 유토피아적 발상이 없었다면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것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몇몇 몽상가의 유토피아가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어버린 경험을 갖고 있다. 여기서 유토피아는 있어야 하되, 동시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베냐민의 자동인형은 바로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리라. 즉 난쟁이(유토피아)는 실제로 작동해야 하나, 그의 작업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

역사의 텔로스(telos), 즉 인류의 최종 목적이 되는 이상사회를 그려놓고 현실을 강제로 그리로 옮긴다는 발상은 시대착오다. 우리는 이미 ‘역사이후’(posthistoire)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토피아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현실로 누리는 것이 한때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상사회의 꿈은 존재해야 하되 동시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터키 인형이 되어 하는 말, 쓰는 글, 하는 행동은 유토피아의 열망에 조종되어야 하나, 그 꿈 자체는 난쟁이처럼 가려져 있어야 한다.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하는 유토피아
과거의 유토피아는 완성태로 존재했다. 어떤 이들은 이 설계도를 그대로 현실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오늘날 ‘유토피아’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한다(데리다라면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면서’ 작동하는 이것을 ‘디페랑스’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가능한 현상이다. 가령 촉매를 생각해보라. 화학반응에서 촉매는 그 자체론 화학적 결합물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 없이는 화학반응이 일어날 수 없다. 유토피아는 촉매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내가 좌파 바바리맨을 싫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1세기에 여전히 긍정적 유토피아 문학을 하는 그 지적 게으름도 맘에 안 들지만, 대중 앞에 옷 홀딱 벗고 빨간 자지, 노란 자지 심판하는 행태는 내 성 취향을 심히 거스른다. 현실은 무섭게 돌아가는데, 거기에 결합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제 자지 색깔의 원색성을 근거로 남들에게 ‘자유주의자’니, ‘프티 부르주아’니 딱지나 붙이는 것은 그냥 중세적 악습일 뿐이다. ‘종교재판’(inquisition)의 어원은 라틴어 1인칭 ‘내가 묻노라’(inquisitio), 즉 남의 신앙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었다.

언어 게임에서 ‘유토피아’가 하는 역할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역사에 텔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어떤 정치적 목적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토피아는 구체적으로 터져나오는 사안을 판단하는 데에 나아가 사안에 대처하는 대안을 만드는 데에 은밀히 작동해야 한다. 마치 촉매처럼. 이번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무상급식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사실 그리 급진적인 요구가 아니나, 평등사회의 유토피아를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이 아니던가.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아무 데도 없다’를 의미하는 그 낱말의 뜻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거기에 그저 무한히 근접할 수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현실에서 유리된 실험실에서 사유하는 한두 사람의 레토르트 몽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그림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삶에서 유리된 정치적 수도원에 사는 몽상가들이 그리는 유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사는 수많은 이들의 꿈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이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오랜 세월이 지나 되돌아보면 우리의 꿈이 이미 실현되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 유토피아의 모습은 한 몽상가의 ‘비전’ 속에서 미리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투쟁하는 세대의 집단적 꿈속에서 ‘기억’으로 뒤늦게 현현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난쟁이는 거울의 반사를 이용해 등을 구부리고 책상 속에 숨어야 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은밀히 그의 조종을 받는 터키 인형이 되어야 한다.

유물론적 과학이 왜 신학의 조종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유토피아의 실현이 과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세속 종교적 신앙,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 열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말한다. “신학적 차원- 베냐민에 따르면 이것 없이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 이 바로 충동 과잉의 차원, ‘지나치게 많음’의 차원이 아닌가?” 사실 광적인 예수쟁이들의 문제는 열정의 과도함에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서나, 아무한테나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는 좌파 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학은 타인을 심판하는 기준이 아니라, 자기를 움직이는 동력이어야 한다. 목소리 높은 좌파들이 번번이 그들이 ‘주사파’라 경멸하는 이들에게 패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홍세화 선생이 지적했듯이, 자기를 움직이는 열정이다(지젝은 이를 프로이트-라캉의 ‘충동’으로 해석한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른바 ‘주사파’들은 자기의 난쟁이를 감춰놓고 터키 인형으로 행동할 줄 안다는 것이리라. 불행한 것은, 그 훌륭한 습성이 심오한 철학적 이해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의 현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뿐이다.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위의 글에서 보자면 진중권은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으며,무한히 추구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상사회를 그려놓고 현실을 거기에 대입해 비판한다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말합니다. 위의 노란색으로 제가 강조한 부분에서 보듯이, 김규항을 좌파 바바리맨으로 칭하고, 김규항이 자신에게 자유주의자 딱지를 붙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학을 믿는 것은 자신을 움직이는 동력이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말은  다음 편에도 계속 될 것이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말로만 진보하지말고 실천을 하라.뭐 이런식의 말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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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 Ⅰ&Ⅱ 컬렉션 디지팩 SE (2Disc)
오우삼 감독, 장국영 외 출연 / 대경DVD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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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삼의 최고 역작. 특히 1편의 형제애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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