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 와인 예찬 - 내 인생의 와인들
심산 지음, 이은 그림 / 바다출판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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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사실 이 에세이를 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와인에 대해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내가 술을 안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와인은 값비싸고 호사스런 문화생활이라는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겠다.

만일 이 책의 목적이 단순하게 저자의 여성편력과 나이를 먹어서도 철이 들지 않은 저자, 저자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리 새로울 것도, 뛰어날 것도 없는 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의 집필의도가 책을 읽는 사람에게 와인의 다양함과 그 각각의 맛에 대해 알려주고 와인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거나 적어도 와인이 그리 까탈스럽지만은 않은 또 다른 술의 하나이다. 라는 정도의 정보를 알려주고자 했다면 그 의도가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이 책을 다 읽고 시계를 보니 대략 밤 11시 경, 난 지갑을 들고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제일 값이 싼 와인을 한 병 샀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작가 심산이 들려주는 감미롭고 드라마틱한 와인 에세이'라는 책 소개 글을 읽었다. 하지만 드라마 틱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소설적 에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야기는 정확하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감미롭고 유혹적인 그림과 함께 달콤쌉싸름한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후반부엔 나이를 먹어도 항상 소년에서 머무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와인을 몰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와인 에세이이다.

저자인 심산님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prologue 와인과 스토리텔링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쓸 때 나의 관심사는 스토리텔링이었지 와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행여 와인에 대한 어떤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하여 이 책을 펼쳐 들었다면 필시 어이없는 낭패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와인은 이 책의 주제가 아니라 소재이다. 나는 와인을 소재로 하여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전개해 보고 싶었다. 문학적으로 볼 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단히 모호한 경계 위에 서 있다.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적으로 소설적인 에세이' 혹은 '에세이 소설'이다.
 
   
 

 그리고 책은 항상 똑같은 포맷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랑하는 처녀의 젖가슴 - 독일의 세미스위트 화이트 립프라후밀히

그때 나는 일일곱살이었고 그녀는 열아홉 살이었다.

까까머리 고딩과 파마머리 여대생. 고딩의 집안은 사업의 몰락으로 파산지경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여대생의 집안은 울산에 있어서 그녀는 대학 앞의 작은 월세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싸가지 없는 고딩은 자기보다 두 살 연상의 그녀를 한 번도 ‘누나’라고 불러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녀가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을 밀히‘Milch'라고 해두자.

모든 첫사랑에서는 풋내가 난다.
 
   

이렇게 시작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밀히와의 연애담, 또는 또 다른 누군가와의 원 나잇 스탠딩에서 저자를 거쳐 간 여자들끼리의 연합군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상상했을 모든 스타일의 연애를 섭렵했다고 적고 있다.

전직애인연합의 절묘한 블랜딩 - 프랑스 론 남부의 샤토뇌프 -뒤 -파프

아직 심산 선생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명로진 선생님께 ‘와인예찬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실화인가요?’라고 여쭈어 보았다.

그만큼 이야기는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경험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렇게 다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연애담을 거쳐 심산 선생님은 이번엔 남자의 이야기로 방향을 바꾼다.

특히 비싸지 않은 와인 하나로도 훌륭하게 주위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남자가 될 수 있으며, 여성을 홀리고 잠자리까지 함께 할 비법도 알려준다.

이탈리아 플레이보이의 비밀 병기 - 베네토의 드라이레드 아마로네

여기서는 등산을 하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곳에서 만난 한 이탈리아 남자 - 하필 이탈리아 남자인 이유는 아마도 이탈리아 남자는 대체로 여성을 유혹하는 기질이 뛰어나다는 선입견, 혹은 진실이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다.- 가 등장한다.

무언가 사연이 있을 법한 그 남자는 어렵게 마련했다며 와인을 조금씩, 마치 쥐똥, 말방구만큼만 돌리면서도 인심을 얻고, 그 야영장에 온 대부분의 멋진 여자들을 돌아가며 섭렵한 후 슬쩍 사라지는 이야기이다.

이쯤 되면 나도 등산을 배우고 와인을 한 병 챙겨서 떠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한다.

내가 마신 로마네 콩티 - 꿈이었던가 생시였던가

조폭, 쌩양아치에게 건네어진 그 값비싼 와인이 음미할 틈도 없이 그냥 원샷! 되어버린 피눈물나는 경험...

꽤나 유머러스하면서도 와인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와인이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얼마나 재미있게 책 한 권을 완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그 책의 전개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경험하게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도 꽤나 그럴듯한 연애의 추억이 몇 개는 있는 것 같다.

심산 선생님께서 와인을 이용해서 연애담을 책으로 엮었듯이 나도 무언가 그럴듯한 걸 하나 잡아서 내 연애담을 책으로 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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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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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은 꽤 재치있는 입담꾼인가보다.
사진 한 장 없고 그림도 한 장 없이 그 두꺼운 책을 냈는데, 그게 그리 빨리 책장이 넘어가기 까지 하니 말이다.

주인공은 어느날 문득 - 새로 이사를 해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단계를 거쳐서 - 등산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길고 오래된 등산코스란다.
전체 거리가 3천 몇백킬로미터라는데, 이게 정확하지 않단다.
정확하지 않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장장 한 페이지 가까운 분량의 지면을 할애한다. 누구는 조금 짧게, 또 다른 누구는 조금 길게... 그러다가 최근에 - 그래봤자 1993년이니 15년 정도 전이지만 - 측량한 거리가 3천389.28킬로미터로 나타나기도 했다고 심각하게 말을 한다.

14P에 나타난, 이 사람이 등산을 하고 싶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참 눈길을 끈다.

   
  [군복 비슷한 등산복을 입고 사냥용 모자를 쓴 사나이들이 둘러앉아 들판에서 겪은 아찔한 경험에 대해 얘기할 때 나는 더 이상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잘 깍은 화강암과 같은 눈매로 지평선을 응시하면서 나지막하고 걸걸한 목소리로 “그래, 숲 속에서 단숨에 해치워버렸지”라고 일갈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결국 남자다워 보이는 그럴듯 한 뭔가가 필요하다는 건가?
남자다움의 욕망... 이 사람도 결국 남자답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

어쨋든 그래서 이 사람이 도전한 무대가 [애팔레치아 트레일]
혼자 하는 여행은 아니고, 오래된 친구인 '카츠'가 함께 동행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두명의 아마추어 등산가는 결국 종주를 포기하고 만다.
꽤 먼 거리를 열심히 걸었다는 이야기, 그 여로에서 만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무서운 곰 이야기에 흑파리떼가 내내 달라붙어 숨쉬기조차 버거웠다는 이야기까지...
어느 산장에서는 젊은 미녀 둘이 목이 잘려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도...

그리고 남은 길이가 지나온 길이보다 현저히 짧긴 하지만...
갑자기 애팔레치아 트레일의 종주가 큰 의미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산을 내려오기까지의 긴 여정.

이 책을 읽으며...
난 내내 아홉살 난 내 딸을 떠올렸다.
딸아이와 강원도부터 시작해서 저 남단까지 산맥타고 걸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렇게 등산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래서 대한민국의 산을 두발로 모두 걸어보게 된다면...
내 딸에게 그 경험은 어떤 기억과 추억을 남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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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3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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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딱 하나다.
얼마전부터 쓰고 싶은 주제가 있는데 그에 걸맞는 자료라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판단은 옳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참, 인간미라고는 전혀 없는 책이군.'

모든 생명체, 살아 숨쉬고 2세를 낳아 기르는 모든 동물을 그냥 생존기계로 취급한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유전자의 지시에 따라 그 유전자를 복제 증식시키는 원론적인 의무에 충실한 그런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모든 일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게 대부분 수긍이 가고 고개가 끄덕여진다는 사실이다.

남녀간의 사랑 - 목숨을 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서 부터 배우자의 불륜으로 고통받는 가정에 이르기까지 - 을 그럴듯하게 해석하고 있고 왜 그런 모습으로 사랑을 하고 사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모조리 해석하고야 마는 그의 놀라우리만치 대담한 상상력에 고개를 내돌리게 된다.

왜 대부분의 연애에서 항상 남자가 구애를 하는지, 왜 여성은 그렇게도 첫 섹스이전까지 목숨을 걸고 뻣대는지... 또한 그렇게 뻣대던 여성이 두번째 섹스부터는 왜 그리도 쉽게 허물어지는지 참 잘도 설명하고 있다.
한 남자에게 쉽게 섹스를 허락하던 여성이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면 다시 처음의 그 뻣대는 것부터 시작하게 되는지까지...

이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또 다른 부분은 이런거다.
같은 시간동안 함께 살았다고 하더라도 두 아이 중에서 하나가 자신의 친자가 아님이 밝혀지는 순간 왜 모든 남자들이 극도로 혼란을 겪고 분노를 느끼는지 말이다.
또한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를 친자가 아니라는 그 이유만으로 오랜 세월동안 사랑했던 게 무색할만큼 냉정해지는지도...

여성이 남성의 재력과 능력을 보고 사람을 선택한다면 남성은 여성의 외모를 본다.
그 이유조차도 사실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경악스럽다.

우리가 영화,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서 감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까발겨보면 사실 그것도 '얼마나 유전자를 잘 복제해서 살아남게 하는가'에 부합하는 행동과 그런 이야기들이기에 감정이 동하는 것이라는 데에 이르러서는 사실 할 말이 없더.

결국 인간은 이리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분명 생물학적 견지에서 유전자와 유전자의 복제를 위해 사용되는 생존기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책을 덮는 순간 나는 마치 한 권의 꽤 그럴듯한 철학에세이를 읽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더불어 이 책에서는 뒤쪽의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밈이라는 단어로 인간의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다른 생명체는 본능에 따라 유전자의 지시를 수행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유전자만이 아니라 고유의 문화나 풍습, 지식이나 삶의 지혜와 같은 것 마저 유전자 복제와 비슷한 방법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말이다.

결국 인간은 유전자의 이런 막강한 파워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또 다른 게 있다는 걸로 이야기를 종결한다.

설령 그게 맞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알고보니 별것아닌 존재라는 것...
그게 참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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