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만날 줄 몰랐고 만날 리 없는 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다 했던가. 2006년에 쓰고, 2007년에 묶은 소설을, 2012년 봄 누군가가 녹음한파일로 듣고 있자니 어쩐지 오래전 멀리 부치고 잊어버린 편지를 돌려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나로부터답장을 받은 느낌. 그런데 그 외 나머지 말, 나머지기억, 나머지 내 봄, 내 어둠, 당신의 계절은 모두 어디 갔을까. 어쩌면 그것들은 영영 사라진 게 아니라라디오 전파처럼 에너지 형태로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다 드물게 주파수가 맞는누군가의 가슴에 무사히 안착하고, 어긋나고, 보다많은 경우 버려지고, 어느 때는 이렇게 최초 송출지로 돌아와 보낸 이의 이름을 다시 묻는 건지도.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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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3월은 초심자들이 넘쳐나는 시절입니다. 저는 그들 의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립니다. 무서울 것입니다.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르면 모른다 말해야 스스로속아 넘어가는 일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래야 감각도 흐려지지않을 겁니다.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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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특한 학생들은 금세 마음과 눈을 열고 봅니다. 누워 지낸지 얼마나 된 것 같으냐는 물음에 여름은 지나서 다친 것 같다고 대답한 친구가 있었지요. 햇볕에 그을린 팔을 보니 그렇답니다. 한겨울이라 흔적도 희미한데 보고자 하니 보입니다.
환자 보러 가, 환자를 봐야 해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본다는 것의 그 깊은 의미 때문에 눈 뜬 장님이 아니고자 고군분투하는 우리입니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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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가량의 세월 동안, 나는 안정된 직장 없이 늘 궁지에 몰린 채 방황해왔다. 너는 내가 그동안 뒷걸음질만 치면서 나약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생각이 옳을까? 나도 이따금 밥벌이란 걸 했다. 그렇지 못할 때는 친구들이 선의를 베풀어 도와주었지. 좋든 싫든 얻을 수 있는 것을 취하면서어떤 식으로든 살아왔다. 내가 많은 사람의 신뢰를 잃었다는 건 맞는 말이다. 경제적인 형편도 좋지 않은 게 사실이고, 내 미래가 처량한 것도 부인할 수 없고, 더 잘할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말도 맞다. 생계유지를 위해 노력했어야 할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도 맞는 말이고, 공부가상당히 허술하고 빈약하며, 필요한 것을 모두 구하기에는 내가 가진 수단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말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옳다고 해서 내가 점점 퇴보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바로 나올 수 있는 것이냐?"

‘그 모든 것이 옳다고 해서 내 삶이 무의미하고 쓸모없다는결론이 바로 나올 수 있는 것이냐?‘라고 바꾸어 읽으면 제가갑자기 그럴듯해 보입니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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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 선 승객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햇빛이 비치는 것을 방해했다. 그들의 그림자가 바닥으로, 의자로, 칸막이벽으로 두 배 세 배 길게 드리워졌다. 객실에는 이 그림자들조차 발 들여놓을 여지가 없어서, 그림자들은 반대편 창문을 지나 바깥으로 나가서는 달리는 기차의 그림자와 함께 경사진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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