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붉게 피는 소리 1
미도리카와 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미도리카와 유키의 작품으로 가장 먼저 읽었던 것은 진홍색 의자 였는데 뻔한 소재를 색다른 시선으로 풀어낸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게 몇 년전이었던가. 하여간 4분의 1 스페이스에 작가가 소개한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으려 했더니 절판이거나 아예 국내 발매조차 되지 않은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더니 나츠메 우인장의 인기를 타고 미도리카와 유키의 작품집이 단편집까지 발매되는 시절이 왔다. 만세를 부르면서도 한편으로 마이너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아쉽기도 한 미묘한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주인공 카라시마는 특이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한 말에 다른 이들은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 잠들어라 ' 라고 말하면 잠들거나, ' 눈 앞에 절벽이 있다 ' 라는 말로 환영을 보게 할 수도 있다. 판타지 소설의 주술사들이 사용하는 ' 언령 ' 이라는 것과 비슷할까. 할 수만 있다면 상대방의 심장도 멈추게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목소리를 듣는 모든 이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힘이다.
그러나 정작 이 힘을 가진 카라시마는 외롭다. 힘을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사람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애정조차 목소리의 힘 때문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와 동시에 살인이나 범죄에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만 한다. ' 왜 힘을 가진 자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 그런 질문을 던지며 자신을 이용하려는 범죄자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소년은 자연히 사람을 멀리하게 된다. 이용당하거나, 피해를 주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되는 인간관계는 부담스러울 뿐이다. 물이 담긴 유리컵을 목마른 소년은 멀찍히 떨어져 바라보기만 한다. 자신이 손 내밀면 반드시 유리컵은 깨어질 것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타인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일견 신나는 일 같다. 그러나 그런 '힘'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카라시마는 잘 알고 있다. 아무리 큰 힘이 있어도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이 만화는 그런 카라시마에게 다가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며 그들을 지켜보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붉게 피는 소리는 말 그대로 ' 소리가 붉게 피어나는 ' 모습을 말한다. 카라시마의 힘으로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위에서 나츠메 우인장을 언급했었는데 이 작품은 설정과 진행 형식 모두 나츠메 우인장과 매우 유사하다. 굳이 말하자면 나츠메 우인장은 이 작품의 변주곡 같다. 비난하는게 아니라 저 정도 변주면 매우 훌륭한 편곡이라고 칭찬하고 싶다. '붉게 피는 소리'의 경우 초기작이라서 그림이 나츠메 우인장 보다 덜 다듬어져 있다. 그럼에도 매우 섬세한 감정선과 캐릭터 설명이 조금 산만한 그림을 충분히 덮어준다. 미도리카와 유키의 팬이라면 반드시 봐야 할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