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정치를 떠나 삶으로 망명한 지식소매상, 유시민 선언서
정치판에서는 능력보다 논리가 우선이다. '어제는 어제의 논리가 있고, 오늘은 오늘의 논리가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면 싸움에서 거의 무적이다. 강자라서 무적이 아니라 뻔뻔해서 그런 것이다. 어제의 논리를 초지일관 지키면서 임하는 싸움은 패배의 가능성이 높다. 피터지게 버티면서 임전무퇴해봐야 남는 건 초연함을 가장한 쓰라린 상처뿐이다.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여기 뻔뻔한 논리싸움에서 밀린 패배자가 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지향하고 정의와 평등, 자유의 가치가 훼손당하는 데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해 정치의 바리케이드 안으로 뛰어들었던 사람. 정치가라기보다 정치 논객의 이미지가 더 잘 어울리는 유시민이 그 주인공이다. 정치판을 떠날 무렵, 그에 대한 세상의 평판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정당 브레이커'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다. 그는 그 평판을 받아들였고, 인정했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입장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목표로 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패배를 자인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유시민은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왔다. 몇 년 전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를 내면서 지식소매상을 자처한 바 있는 그가, 이번엔 아주 전격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명찰에 ‘지식소매상’을 새겨서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지식소매상다운 무기가 들려있었다. 고수의 내공이 느껴지는 원론적인 명제가 새겨진 무기, 『어떻게 살 것인가』가 그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 삶과 죽음 사이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를 털어놓고 있는 일종의 고백적 에세이다, 2013년 3월 13일, 초판을 찍은 책은 닷새 뒤, 2쇄를 찍었고 무려 10만 부가 팔려나갔다. 10만부는 결코 만만한 부수가 아니다. 방송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은 팟캐스트가 정치적 활동과 관계된 책들의 판매고를 뚝뚝 떨어지고 있는 출판시장에서는!
백만부 판매의 신화를 기록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비롯해 내는 책마다 마니아 독자층을 확보해온 막강한 글발 덕분일까. 아니면 지식소매상을 선언한 유시민의 심적 변화를 궁금해 하는 시민이 그만큼 많아서일까. 이유야 어떻든 10만부를 넘어선 뒤로도 책은 꾸준히 잘 나가고 있다. 초반에 확 붐을 일으켰다 금방 시들해지는 책의 경우 중고서점을 뒤지면 정가의 절반 이하에 책을 구입할 수 있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의 중고가는 건재하다. 책을 구입한 10만 명의 독자가 책을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내용 자체만 놓고 볼 때, 솔직히 소장하고서 두고두고 읽어볼 만한 정도의 책은 아닌 듯하다. 책은 프롤로그와 본론, 에필로그로 이뤄진다. 이 가운데 유시민이 이번 책을 내게 된 동기가 집약된 게 1장이다. 여기서 유시민은 세상의 질서와 잣대를 벗어나 록음악에 올인한 크라잉넛을 과하게 내세운다. 그들처럼 살고 싶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한다. 마음 가는 대로 살자! 사회적 기준에 구애받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누군가 정해준 꿈이 아니라 나 자신의 꿈을 꾸자! 유시민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청소년들의 그 흔한 캠프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캐치프레이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박하다면 소박하달 수 있는 꿈을 털어놓는 내용에 맞추어선지 문장 또한 평이하고 느슨하다. 가쁘게 치닫는 논쟁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이 배어나는 문장이라 여유 같은 게 느껴진다. 그러나 유시민 특유의 문장 맛은 덜했다. 정치논객으로 활약하던 당시, 상대방의 허점을 가차 없이 파고들어 논리정연하게 주장을 관철시키던 날카로운 어법을 이번 책에서도 기대했던 탓일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이 책의 어떤 매력이 사람들을 사로잡았을까. 유시민의 이름값으로 치부하기에는 사실 그는 한물 간 정치인 아닌가. 그럼 혹시 대선 이후 대한민국을 휩쓴 이른바 멘붕상태가 원인인가? 정신이 무너질 정도로 충격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 자체가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이 지점에서 책의 진가에 대한 논의는 결국 유시민이라는 논객, 지식소매상으로 귀착된다.
그는 이 책에서 ‘나답게 살기’의 진수를 보여준 ‘크라잉넛’에 견주어 55살 중년에 이른 자신의 인생을 평가한다. ‘닥치는 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그것은 그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으며 옳다고 믿는 방식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라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기쁘게 살고’ 싶다는 결심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글은 한 편 한 편이 다 아름다운 에세이인데,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정치권에서 받은 상처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내면이 드러난다.
유시민이 과연 이렇게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던가. 뜻밖이라는 느낌은 다행히(?) 그가 취한 삶의 스탠스에 대한 기대로 대체된다. ‘나답게’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고 싶다면서 그가 제시한 삶의 방식은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이다. 그가 지식소매상으로서 남은 생을 설계하기로 한 이유 또한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다. 연대의 한 방법으로 정치를 선택했듯, 이제는 글쓰기를 통해 사회적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기쁘게 연대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글쓰기와 연대의 삶!’ 결국 이것이 유시민이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핵심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 유시민이라는 텍스트
누구나 어렵지 않게 꿈을 이야기하고, 열정을 이야기하고, 연대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유시민이 살아온 삶의 무게와 진정성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는 바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는 꿈이다. 이 소박한 꿈이 글쓰기와 정치(젊었을 적에는 운동) 사이를 오가며 숨 가쁘게 달려온 삶의 한 고비에서 고백되었을 때, 그 말은 다른 무게를 가지고 독자 앞에 다가간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이 던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가 책에 담아놓은 말과 말 속에 숨어있다.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놀이와 일과 사랑과 연대에 대해 그가 털어놓은 말의 함의는 유시민이라는 한 풍운아가 그려나가는 삶의 밑그림에서 찾아야 한다. 이 책의 진짜 텍스트는 정치를 떠나 삶으로 망명한 유시민, 바로 그 자신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