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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미자입니다
홍혜문 지음 / 북인 / 2022년 1월
평점 :
홍혜문 작가의 신작 『나는 안미자입니다』는 흔히 말하는 ‘잘 쓴 소설’의 기준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쓴 작품들이다. 작품을 일독하고 뒷표지를 덮었을 때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아, 이 작가는 한 작품 한 작품을 온정신 온몸으로 뛰어들어 썼구나. 끝장을 봤구나.
맨먼저 읽은 게 표제작 <나는 안미자입니다>이다. 나는 안미자입니다, 라니! 제목을 보는 순간 대번에 나는 엄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살과 뼈와 꿈과 삶을 바쳐왔을 이 땅의 여인들을 떠올렸다. 그네들의 거친 손을 떠올렸고, 살이 내려 뼈가 그대로 드러나는 어깨와 굽은 등을 떠올렸다. 표지에 그려진 여인들의 얼굴에는 눈도 귀도 입도 없었다. 얼굴을 가지지 못한 채 살아온 안미자가 소설 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있었다. 자신이 이제 다 늙어 치매가 걸리고 거동을 못하게 되자 평생 고생해서 키운 딸년이란 게 자신의 이름인 안미자를 다른 여자(간병인)에게 주려고 한다. 미자는 화딱지가 나서 딸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고 자신을 냉대하는 간병인에게 오줌이 가득 든 요강을 엎어버린다. 한판 성질을 부린 덕에 요양병원행이 결정된 안미자는 충격 탓인지 죽음을 맞는다.
현실에서 우리가 드물지 않게 보는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홍혜문 작가의 이 작품이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소설적 미학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눈앞에 치매 걸린 늙은 여자, 우리 엄마들 같은 늙은 여성의 삶을 세밀하고 리얼하게. 마치 다큐처럼 근접해서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야, 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 울리는 것 같아 마음이 짓눌리듯 아팠다.
안미자를 비롯해 작가 홍혜문은 우리 주변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지나쳐버리는 존재에게 눈길을 보낸다.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의 상간녀에게 살인미수죄로 누명을 쓰고 남편도 빼앗기고 아이도 유산하는 만희(워터 히야신스), 뿌리를 찾아 머나먼 과거 고조선의 소도를 여행하는 꿈을 꾸는 조각가 이안과 부랴트족 여성 샤를(바하이),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심리적 상처를 해소하게 돕는 심리상담사(트임벨), 사회적 성공을 성취하려는 조바심을 감추고 투자자 제임스 김을 만나러 가는 주인공(내 마음의 렌즈), 사랑했던 남자와 가장 친한 친구 사이에 낳은 딸을 키우는 말분(말분의 사랑), 전설적인 굴착기 기사였던 아버지의 과거를 자신의 디자인 작업을 통해 이해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등이 다 그러한 인물들이다.
이 작품들과 결이 다른 소설이 <해저터널>이다. 이 소설을 같은 작가가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소재가 색달랐고 주인공 인물의 선택이 차갑고 계산적이고, 어떤 점에서는 합리적이고 단호했다. 다리를 놓는 일의 공사감독을 하는 태국이 통영의 해저터널 현장으로 가서 첫 함체를 만들던 날 아내는 난소암 판정을 받았다. 아내는 수술을 받고 몸이 점점 나빠졌으나 태국은 오로지 함체 만드는 일에만 총력을 기울인다, 아내가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는 동안 함체는 열여덟 개가 만들어지고 마침내 임시계류장에서 바닷물을 채우는 과정을 거쳐 바다 밑으로 가라앉히는 마지막 공정을 앞두고 있었다. 그 와중에 태국은 직원식당에서 일하는 정화와 서로 은근히 마음을 주고받기도 한다. 마침내 해저터널을 놓는 공사가 마무리된 날 그를 원망하던 아내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태국은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바닷속으로 난 터널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 속에서 아내가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돌아보는 모습도 상상한다. 일에 미친 남자, 자기 일을 사랑하고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 남자 태국은 한국에서 가족보다 일이 우선인 한국의 아버지들, 한국의 남편들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아내가 죽어가는데 어떻게 자기 일에 이토록 열성일 수 있을까 싶지만 그게 우리 주변의 아버지들이고 직장인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인생을 바쳐 일에 매달리고 성취를 이룸으로써 태국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다. 그걸 나쁘다고, 부도덕하다고, 비윤리적이라고 자신있게 비난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게 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불쌍한 건 병들어 죽은 아내다. 어쩌겠는가. 그런 남편을 만난 게 죄지. 쓸쓸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소설적 감상과는 별개로 이 작품이 거둔 소설적 성취에 대해 한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 <해저터널>은 중편에 가까운 단편소설로서 국내 작가들 가운데 아무도 소설로 다룬 적 없는(내가 알기로는) 까다로운 소재를 치밀하게 조사하고 취재하여 소설로 완성해 냈다는 점이다. 문학적으로 완성도를 이루면서 이렇게 긴장감 있는 서사를 만들어 냈다는 건 작가 홍혜문의 앞으로의 작업에 큰 기대를 걸게 한다. 『나는 안미자입니다』라는 책을 받아들었을 때는 제목에서 받은 아련한 슬픔이 가슴을 채웠고, 책 한 권을 다 읽고 났을 때는 심하게 진한 커피 첫 모금을 꿀꺽 삼켰을 때와 같은 타격감이 가슴팍에 전해졌음을 밝히는 것으로 이 책의 리뷰를 마치련다.
태국은 굳어가는 직육면체의 긴 함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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