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살아오면서 남긴 죄의 흔적 때문이든,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날들이 돌이켜볼수록 한심해서이든, 남들이 알까 겁나는 수치스러운 행적 때문이든, 혹 지난 시절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사람이라면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쓴 책, ‘어제’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어린시절에 2차 세계대전을 겪고 친구도 친척도 없는 스위스에서 망명자 신분으로 하루 열세 시간씩 시계공장에서 노동을 했던 전력의 작가인데, 그녀가 중년에 이르러 발표한 이 소설에도 어린시절에 겪은 끔찍한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다.


시간적 구성으로 보면 소설은 토비아스가 창녀인 어머니 레스테르한테서 자신을 떼내어 무료기숙학교로 보내려는 아버지 상도르를 칼로 찌르고 집을 나오는 12살 무렵에서 시작된다.  ‘상도르 레스테르’로 이름을 바꾸고 공장 노동자로 살아가는 그의 유일한 낙은 글을 쓰는 일과 린이라는 꿈속의 여자를 기다리는 일이다. 꿈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린은 사실 그가 완전히 지워버리려 했던 과거의 시간 속,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그의 배다른 여동생이다.


토비아스의 마음속에서 꿈속의 연인으로 자라난 이복누이인 린이 어느날 남편과 아이가 있는 현실의 존재로 그의 앞에 나타난다. 그의 꿈은 현실이 되고 절망과 공포에 쫓기며 외롭고 가난하고 고독했던 삶을 살아왔던 토비아스는 처음으로 린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을 바라게 된다. 토비아스는 자신과의 관계를 의심해서 아이를 지우게 하는 등 겉보기와 달리 폭압적인 린의 남편을 죽이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릴 때 아버지를 죽이는 일에 실패한 것처럼 린의 남편을 죽이려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간다. 남편과 이혼한 린은 공장노동자인 토비아스를 버리고 교수직이 기다리고 있는 고국으로 돌아간다. 몇 년이 지난 뒤 토비아스는 주변에 있던 한 여자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은 가장으로, 여전히 공장노동일을 하며 살아간다.


한 시대의 절망과 우울을 배태한 전쟁의 상처를 다루었다고 하지만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소설에는 심오한 철학이나 해찰을 담은 작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전쟁통의 비참한 삶을 극적인 휴먼스토리로 다룬 것이라 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다독거림과도 같은 따듯하고 푸근한 위안을 이 소설에서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토비아스가 상도르와 린이라 이름을 지은 두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그때까지 토비아스가 보여준 등뒤를 쫓기는 짐승처럼 불안하고 위태한 모습과 대비되면서 (안도감이 아니라) 묘한 감동을 안겨준다. 이름을 바꾸고 망명자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지워버리려 했던 과거를 현실 속 일상으로 들여온 토비아스의 선택에 아픈 공감이라는 말을 써도 좋다면, ‘괜찮다 다 괜찮다’ 웅얼거리는 늙은 시인의 목소리가 마음에 방점을 놓듯이 토비아스가 선택한 삶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리없이 인생이란 결국 그런 게 아닐까. 다른 인생을 선택할 여지가 아예 주어지지 않을 경우에도 끝장을 내버리지 않는 한 선택의 여지없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인생을 감쪽같이 잊든가, 잊을 수 없다면 변형을 시키든가 해서라도 제 현실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살아남아야 한다는 가차없는 생존의 규칙 같은 것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 역시 마음속에 그려지는 꿈을, 실현불가능한 인생을 매일 매순간 포기하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달래고 윽박지르며 살아가지 않는가. 


살아남아서 오늘에 속해있는 자가 돌아보는 시간인 ‘어제’는 깐깐한 희망을 보여주는, 내가 늙어서 전원주택으로 갈 때 가져가려고 작성하는 도서리스트에 올린 작품이다. 아, 그리고 번역작품이라 좀 그렇긴 한데 ‘어제’를 이야기하면서 이 말도 빠트려서는 안될 것이다. 작가의 냉정한 현실수용을 반영한 듯 가난한 이들이 모이는 술집과 지저분하고 어두운 거리, 단조로운 일을 반복해야 하는 공장을 배경으로 군더더기 없이 삭막하게 전개되는 장면들과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건조한 문체는 전편을 통째로 필사하고픈 생각을 일으킬 만큼 매력적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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