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컷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집사재 / 1996년 3월
평점 :
품절



 영화도 그렇지만, ‘이 한 편의 소설’이 던져주는 맛은 결국 내러티브에 달려있을 거라는 게 일반 독자로서 내가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식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이 상식에 엑스를 쳐야 하는 거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카버의 단편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고난 직후 대체 내가 뭘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실소한 기억이 있다. 그게 이번에 읽은 ‘숏컷’에서도 마찬가지다. 둘 다 꽤 재밌게 읽은 것 같은데 내용은 오리무중 지워지고 각 단편에 숨어있던 개개의 인물들만 반갑잖게(!) 떠올랐다 사라진다.

분명히 카버 소설의 인물들은 인상적이다. 두려움, 어리석음, 맹목적 집착, 허약함, 우둔함, 의심, 허영 따위 약점으로 하여 인상적인 인물들이 반갑잖은 이유는 내 속의 그것을 은근슬쩍 들추는 낯익은 약점으로 인해 그들이 처하게 되는 상황이 방어기제를 작동시킨 듯 불편해서일 것이다. 이 불편함 때문에라도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들을 얼른 지워버리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다. 


  ‘발밑에 흐르는 강’에서 흐릿한 과거의 기억을 남편이 관련된 강간살인 사건에 오버랩시켜 어지러운 독백을 이어가는 클레어를 비롯해 이삿짐을 싸놓고서 매번 새로운 곳에서의 인생을 꿈꾸는 ‘상자’의 어머니, ‘아버지가 죽은 세 번째 이유’에 나오는 어리석고 광폭한 제재소 잡부 더미와 한없이 예의바르며 겸손한 ‘뚱뚱보’의 뚱보 등이 모두 단편소설의 내러티브를 뛰어넘어 독자의 신경을 건드리는 인물들이다. 카버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를 했던 하루키는 그의 소설을 들어 기억에 남는 인물을 그려 내놓는 것만으로도 단편소설로서의 값어치는 충분하다고 평한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의 안톤 체홉이라 불리는 카버의 단편소설의 진미는 약점투성이인 인물이 겪는 사건과 더불어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작은, 아주 작은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카버의 소설적 배경은 대개 이름없는 작은 마을이거나 시골읍 같은 곳이다. 일어나는 사건도, 사건이랄 수도 없는 아주 사소한 일이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장소에서 별 시답잖은 인물들에게 일어나는 별 것도 아닌 일이 카버의 시선에 포착되면 기묘하고 불길한 음화로 현상된다. 그물에 걸려들 듯 그가 우리 앞에 던져놓는 세계의 현상에 눈을 주는 순간, ‘그것이’ 실은 별 거였다는 사실에 직면한 충격이 온몸에 소름처럼 돋아난다. 동시에 우리 일상 속의 모든 것이 의미심장하기까지 한 무엇일 수 있다는 돌연한 깨우침은 오싹하기까지 하다. ‘뚱뚱보’에서 엄청나게 뚱뚱한 자신의 덩치에 대해 미안해하는 뚱보와의 만남이라는 일상적인 사건을 겪은 뒤에 그 뚱보처럼 거대해진 자신의 덩치를 느끼게 되는 웨이트리스에게서처럼 이 작은 변화는 어느 한순간 스쳐 지나가듯 일어난다. 누구도 이 변화를 미처 알아채지 못하며 대응하지 못한다. 때문에 변화는 보다 본질적이며 완전한 것이 된다.

레이몬드 카버가 암 선고를 받고 체홉의 죽음을 소재로 삼아 쓴 마지막 단편소설 ‘심부름’에서 톨스토이가 죽어가는 체홉을 찾아와서 하는 말은 (소설)인물들을 적확하게 꿰뚫고 있으며 카버 자신의 이미지를 투사했을 거라는 확신을 얹어놓는다.

“……우리들 모두가(동물까지도) 우리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은 본질과 목표를 가진 원칙에 근거하여 살아가야 한다.”

아시다시피 본질이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하면 부부간에, 부모자식간에, 이웃간에, 심지어 그 자신과의 오고가는 대화가 엇나가듯 카버 인물들의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비극은 본질적인 것으로의 회귀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 이제는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생의 미아가 되지않기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수수께끼가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소한 징후를 내보이며 운명의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오고 있을지도, 둘러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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