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우리에게도 절망할 수 있는 선택권을 달라
황해문화 50호 - 2006.봄
황해문화 편집부 엮음 / 새얼문화재단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일본 SF소설의 첫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개인적으로 나는 미야자와 겐지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작품 수로 밀리니까) 호시 신이치의 짧은 소설 <기묘한 이야기>에 수록된 <옷을 입은 코끼리>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최면술 분야에서 상당한 재능을 갖고 있는 한 남자가 동물원에 있는 코끼리에게 말한다. "넌 코끼리가 아니야. 인간이야.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생각해. 넌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어. 알겠지? 넌 인간이야." 그는 그저 장난으로 말한 것이지만, 이게 왠일인가. 코끼리는 동물원을 빠져나와 자기가 알몸임을 깨닫고 옷을 찾는다. 기성복은 맞는 게 없어 특별히 제작하고 아차,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 "지금은 가지고 있는 돈이 없습니다. 일해서 번 다음 드려도 될까요?" 그 덩치로 도망쳐도 숨을 곳도 없으니 그렇게 하시라고 주인은 말한다. 코끼리는 연예프로덕션을 찾아가 '코끼리 흉내를 내며' 탤런트가 된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유원지를 경영하고 과자회사, 장난감 회사로 사세를 확장한다. 그리고 틈틈이 독서도 하고 불우이웃도 돕는다. 그리던 어느 날, 그의 '인격'에 감동받은 한 사람이 묻는다. "당신은 엄청 성공하셨군요. 도대체 그 비결은..." 도대체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성공하고 싶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2005년 8월을 기준으로 서울시에는 약 506만 명의 인원이 살고 있다. 이는 정부가 발표한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 548만 3000명과 맞먹는 숫자다. 그냥 서울시에 사는 인원이 대한민국에 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치자. 그들 중 특수고용 노동자는 약 63만 7천 명이다. 특수고용직을 다시 쪼개서 여성이 98%를 차지하는 생활설계사는 29만 6천 명(1998년 기준), 학습지 교사는 작년에만 3만 명이 추가되었다는 발표만 있고 정확한 통계도 없다. 통계가 없는 게 이뿐인가.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2001년 국내 택배 실태조사'에서는 전국 오토바이 레이서들인 택배인원이 몇 명인지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다(어떻게 알겠는가. 노동자가 아닌데). 비정규직은 아니지만 전국의 길거리 음식점인 노점상은 3천 524포(2004년 기준)이고 아예 최저생계비인 113만 6천 원(2004년 기준 4인 가족)도 벌 능력이 없는 도시 빈민의 숫자는 파악도 안 된다.

다시 돌아가서 2005년 기준 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220만 원이다. (이럴 수가!) 이에 비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112만 원. 딱 반값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더 짧은가? 지난해 '레이버 투데이' 에 실린 기사만 놓고 볼 때 정규직은 주당 43.5시간, 비정규직은 44.9시간을 일하고 있다. 그런데 내년 1월 1일부터 종업원 300명 이상 회사의 기간제(계약직) 근로자가 2년 이상 계약직으로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비정규직 법안'이 27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정부는 이러한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나름 고심한 법안이다. 근데 왜 노동자들은 시민의 발인 지하철까지 운행 중간해가며 이를 반대하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사업주라면 비정규직 노동인력을 채용하여 일을 시키고 2년 지난 후에는 두 배의 월급(위의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을 주고 그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바에야 그냥 짤라버리고 다시 비정규직 인원을 모집하는 것이 당연히 낫지 않겠나. 조금 양심적인 사업주의 경우에는 그들 중 몇 명은 구제해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몸으로, 발로 뛰어다녀야 하는 전국의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요식업 종사자, 청소용역 파견근로자, 택배직원, 설문지 조사자, 텔레마케터... 등등은 외려 기존에 자신이 쌓았던 노동기간조차 말소시키는(2년 후 정규직으로 전환이라는 내용에는 이전 근무기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개악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2년마다 다른 사람 찾는 데 비용을 쓰는 것보다 기간제라 해도 2년 동안 숙련된 사람을 쓰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기업들도 만만찮게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헤헤, 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러나 앞서 전제했던 저러한 수치들은 사실 우리에게 그 실상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가 548만 3000명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하루 똑같이 일하고도 차별받는 모두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담화에서 밝혔듯이 우리 사회가 현재 처한 가장 큰 문제는 '사회 양극화' 이긴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실재를 담보로 한 말인지는 저 '비정규직 노동 개악안' 통과를 통해 다시 읽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작년 11월 국회에서 통과된 '쌀협상 비준안' 또한 대한민국 자영농민은 국민으로 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을 수 있다. 한미FTA에서 뜨거운 감자로 언급되는 '스크린 퀘터제' 폐지 또한 대한민국에서 독립영화(메이저 영화나 일인시위에 나선 영화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를 하겠다는 싹을 아예 잘라버리겠다는 정부 의지를 반영한 것이 아니고 뭐겠는가. '시대적 대세'를 이야기하려면 그 전에 정부가 앞서서 그 대세에 맞설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했어야 옳다. 앞으로 다가올 출판시장의 개방이나 교육 분야의 개방, 의료 분야의 개방... 사회 전 분야로 확대되고 있는 '개방압력'으로부터 무엇을 지키고,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육성하고 있는가는 시민의 몫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부가 해야 할 임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세금을 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이것을 정부가 못했을 때 정부를 향해 돌을 던지거나, 파업을 하는 것은 세금을 내는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편파적인 기사나 대세론에 힘을 실어주는 '대학교수'들의 공정한 듯 보이는 전문적인 글들을 파고들면 실제로는 전혀 현실을 담아내고 있지 않은 경우가 너무 지배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는 언론이 공정하게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나의 '알 권리'를 빼앗는 것이고, 알았다 하더라도 전문성을 앞세워 기를 죽여놓는 대학교수들의 글발에 의해 나의  '반대할 권리'가 차단되는 것이라고 나는 지금의 나를 진단한다. 다른 사람들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신지? 그러는 와중에 만난 <황해문화 50호>는 내가 올해 만난 무척 값진 책이다. 계간호라는 잡지의 특성상 대체로 출간된 계절에만 잠깐 읽히고 마는 것이 출판현실인데 올 봄 이 책에 실린 내용은 파격적이다 못해 아프다.

첫번째로 파격적이라는 것은 그 기획의도에서 밝히고 있듯이 기존의 잡지 구성 체계를 과감히 버렸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대개의 잡지 체제가 특집으로 다루는 부분에 대한 전문가들의 글, 시대를 살아가는 문학인들의 글, 지역사회나 생활인의 글, 주목하는 책이나 동향 들로 '다양한' 소리를 담아내고 있지만 실상은 한 얘기를 또 하거나 너무 전문적이어서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잡지가 가지고 있었던 권위적인 부분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에 따라 잡지의 체제를 과감히 버릴 수 있다는 것은 그 내용을 담아낼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며, 이는 잡지가 갖고 있는 기존의 기성, 권위, 체제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예를 들어 한 신문사가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양극화'로 보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스포츠, 과학 모든 지면에서 각 분야의 전문인이 아닌 다양한 계층과 시민들의 목소리를 딱 한 달간만이라도 담아낸다고 치자. 이어서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확실한 언론기관이자 홍보실인 텔레비전에서 매일 같은 시간 딱 한 달 동안  '사회 양극화'에 관해 시민들(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사업가, 교육가, 상공업자, 학생, 주부...)이 맘껏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문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방영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자기 목소리를 한 번도 담아내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서 농토가 갈아엎어지는 막막한 현실에 처한 농부들이 공권력을 앞세운 전경들과 폭력시위를 해야만 하는 아픈 현실이 조금은 개선되지 않을까. 그들과 함께 하는 것도 그렇다고 그들의 문제를 내 문제로 껴안을 수도 없는 도시 월급쟁이들도 '당신들만 아픈 게 아니'라고 속을 긁기 전에 '나도 살기 힘들다'고 한번이라도 정부를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봤다면 농부들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라고 느끼지는 않지 않겠나~ 요.

두번째로, 이 잡지를 보며 내가 아팠던 것은 '대한민국의 상처와 희망을 이 땅의 50인에게 듣는다'는 표제처럼 대한민국이 이렇게 아픈 나라구나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묻자 마라 갑자생이 단지 그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군에 징병되어 원폭피해자로 평생을 살 수밖에 없었고, 민족 반역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온갖 차별을 받으며 살아온 이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울분, 친일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부모 세대가 누린 권력으로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을 접하며 자란 이가 동시대를 걸어온 같은 세대에게서 느낄 수밖에 없는 단절된 역사, 대한민국 군대(국군)의 총칼에 의해 한 날 한 시에 부모형제를 잃은 석달동 양민 집단대학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의 증언과 그간의 노력, 대한민국 사법부의 치욕으로 인용되곤 하는 인혁당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한 맺힌 반세기, 군의문사로 자식을 잃은 자의 요구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건 은폐의 문제들, 베트남 참전 용사가 들려주는 고엽제 피해의 실상과 대책, 빨갱이 자식이 자신의 출신성분을 숨기고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은 고통의 삶, 그리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들의 문제, 문제들, 상처들...

1부 '풀리지 않은 미완의 과제, 역사'만을 들쳐봐도 그들 각자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 여전히 풀리지 않고 정당한 요구마저 짓밝히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 때문에 아프다. 아픈데 2부 '노동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에서는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떼고 미얀마로 돌아가는 뚜라의 한 마디 '"안녕히"라는 말이 나를 더 깊숙이 찌른다. 나중에 자신의 아이도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까봐 겁이 난다는 학습지 교사직에서 해직된 한 여성의 말이 또 나를 찌른다. 어느 청년 백수가 들려주는 일상과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들이 바로 우리 옆집 총각의 이야기여서 또 찔끔거린다. 지방대학을 나온 대학원생의 이야기가 내 친구의 이야기여서 못 본 척 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한 장애인이 희망이 아닌, 배려가 아닌, "우리에게도 절망할 수 있는 선택권"을 달라고 외칠 때는 가슴이 먹먹해져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내가 볼 수 없었던 것들, 보지 않았던 것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책이야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게 일러주었다. 물론 이 책에 실린 상처들은 곪고 곪아서 아픈 것들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는 평범한 기업인의 이야기나, 386세대의 전진을 '자유화, 세계화'를 통해 주장한다거나, 자유민주주의가 시장경제의 진보의 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유기업원 연구원의 목소리도 포함된다. 다만 그들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 현실과 함께 실림으로써 어느 것이 허위이고, 가식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분명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우리 사회 50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느 전문가의 글보다 현실적이고 희망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있게 길을 터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를 모른 체하는 거대 언론의 주목을 받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다 얘기한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대안은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건 옷을 입은 코끼리에게 찾아가 "도대체 그 비결은..."이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코끼리는 말했다.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너는 인간이야'라고 항상 속삭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저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이라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죠. 항상 배우고 생각하며 그대로 실천해왔을 뿐입니다. 제가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 때문인 듯합니다. 당신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한 권의 단행본으로 읽어도 괜찮은 책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펴낸 <길에서 만난 세상>, 이준희의 <세상 속으로> 등의 책들이 갖고 있는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들려주는, 즉 날것의 적나라함(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 글도 포함해서)은 직격탄을 날린다. 일독을 권한다. 단, 원고를 늦게 주는 필자가 꼭 있기 마련이고 마감에 쫒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교정자의 실수가 꽤 많다.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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