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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한경화 지음 / 산지니 / 2021년 9월
평점 :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는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생긴다.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하다 책장을 훑었다. 봄비라는 제목의 소설집이 눈에 띄어 집어들었다. 2017년 단편소설 「종점」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한 작가 한경화 소설가의 첫 번째 단편집이라는 소개가 나온다.
봄비라는 제목에 끌려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등단작 「종점」은 낯선 동네에 미용실을 차린 여자의 이야기다. 삶의 끝자락으로 밀려난 듯 신산한 삶을 사는 여자의 신산스러운 삶을 그려나가는 가운데 삶에 대한 긍정이 알게 모르게 피어오르는 소설이다. 우울한 현실을 살아가면서 우울하지만은 않게 삶을 끝까지 붙잡는 여자의 태도 속에 희미하지만 어떤 희망이 고여있는 듯도 하다. 희망을 붙잡는 한 인간의 삶은 종점에 서 있다 해도 종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날선 현실은 이어지는 소설에서도 나온다. 「봄비」에 나오는 상우와 창수, 희영이 살아가는 현실은 보다 더 날것으로 인물들의 삶을 공격한다. 상실을 감내하면서 대놓고 반항도 속시원히 할 수 없게 현실에 발이 묶인 이 인물들은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절망조차 사치라는 것을 알아버린 인물들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것 같은 그 현실을 붙잡고 자신의 삶을 끈질기게 살아나간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자신에 대한 믿음인가? 삶에 대한 믿음인가? 그런 의문과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참으로 특별할 것 없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어쩌면 가장 본원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읽는 게 힘들다. 솔직히 현실도 힘든데 소설에서까지 힘든 삶을 봐야 하는 게 억울한 심정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 소설은 다음소설을 읽으라고 낮게 외치는 소리가 들어있다. 잘못 걸렸다. 마지막 소설을 읽을 때까지 다른 책을 집어들기는 어렵게 됐다. 그래, 읽어보자. 한경화, 라는 이름도 낯선 작가한테 낚인 건 오늘의 내 운명인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