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3월
절판


인간의 몸 또한 통역 작업이 행해지는 여러 방을 가지고 있다. 내 추측에는 여기에서는 원본이 없는 통역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물론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 원본 텍스트를 갖는다는 기본 생각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 원본 텍스트가 보존되는 장소를 영혼이라고 부른다.-23쪽

우리에게 눈으로 지각하는 일은 너무나 쉽게 일어나서 모두 지나치게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게으르기 때문에 새로 빛의 유희를 언어로 옮기기보다는 언어의 이미지를 시각으로 옮긴다. "저 사람 흑인이야"라고 뇌가 말하면 눈은 이제 더 이상 그 피부의 색을 진짜로 보려하지 않는 것이다. -80쪽

이 문방구의 왕국에서 내 마음에 든 것은 그 외에도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가 있다. 이 멋진 이름은 내가 외국어에 대해 갖고 있는 동경을 몸으로 직접 보여준다. (...) 그러나 나는 이 물건을 특별히 좋아하는데, 이 물건이 서로 붙어 있는 종이들을 분리하는 것은 거의 마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엄마말(모국어)에서는 단어들이 사람과 꼭 붙어 있어서 도대체 말에 대한 유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없다. 엄마말에서는 생각이 단어와 너무 꽉 들러붙어 있어서 단어나 생각이나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수가 없다. 외국어에서 사람들은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 같은 것을 가진다. 이 제거기는 서로 꼭 붙어 있는 것과 꽉 묶여 있는 것을 모두 제거한다.-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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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제도와 사람: 제도의 악용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는 공적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김인경 씨는 국제표준화가구(ISO)가 정한 기준에 따라 기업경영시스템을 심사, 평가하는 한 인증심사기관에서 10년째 심사원으로 일하고 있다(심사원의 결과보고를 근거로 인증발급기관이 인증을 발급함). 현장을 직접 방문해 심사하기 때문에 그는 그동안 업종도 다르고 규모도 다른 수많은 기업을 경험했다.

** [대기업은] 디자인하고 실질적으로 조립 정도를 하고 나머지는 전자제품, 자동차, 다 진짜 협력회사에서 하거든요? 실지로 환경 문제는 생산현장에서 생기거든요? 실제로 그 생산현장에서 적법한 어떤 환경처리가 되지 않으면 대기업이 아무리 환경에 대한 우수성을 인증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부분이 배포가 안되면 눈 가리고 아웅이거든요? – 83쪽

  

김인경씨는 환경경영시스템(ISO 14001) 인증심사를 다니면서 느끼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환경경영시스템 인증 취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라고 한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기업들이 인증을 땄다는 말이다. (...) 

그런데 환경경영시스템의 경우,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 관리가 특히 중요하다. "환경문제는 생산현장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국제표준화기구가 하청업체까지 포괄하는 경영시스템(Supply Chain Management)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도 환경 분야에서부터였다. (...) 그런데 우리나라 대기업은 인증취득의 효과는 누리되 시스템 구축에 따르는 부담은 하청업체들에게 전가한다. 하청업체들을 시스템에 포함시켜 함께 개선해나가도록 하자는 게 환경경영시스템 구축의 취지인데, 대기업은 "문제가 생기면 개선을 시키는 게 아니라 차라리 아웃을 시켜버린다." 즉 견디다 못한 중소기업이 못하겠다고 하면 "안해? 다른 데 할 데 많아"하고 업체를 바꿔버리는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기술이나 자본, 인적 자원이 취약한 중소기업은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떨어지거나 문을 닫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 84-85쪽

한국에서의 인증제도 도입의 맥락과, 급속한 확장이 가능했던 배경, 즉 "중국을 제외하고는 환경경영시스템 인증 취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라는 사실의 의미를 추적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송도 컨벤시아에 LEED(Leadership in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 인증을 받은 것이 한 축에서는 "한국 최초의 친환경건축설계 인증"이라는 홍보효과를 노린 것이라는 설명도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인증제도를 소비가 아닌 생산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아니 그게 출발이 되어야겠다는 게 또 다른 발견이다. 결국 공정무역이나 FSC, 유기농 등의 모든 인증들은 생산과정에서 적법한 절차를 거쳤음을 표시하는 것인데, 소비의 측면에서만 인증을 다루는 글들이 어쩌면 접근방식에서부터 딱 그만큼의 글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  

물론 인증제도의 목적은 결국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새로운 축적의 수단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당근이 많아도, 거기에 가장 핵심적인 당근, 그러니까 수익이 없다면 자본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인증이 품고 있는 내면의 복잡다단함은, 이것이 직접적으로 판매나 부가적 이익, 하다못해 기업 이미지 개선(놀라운 CSR의 효과)으로 연결되지는 않더라도 울며 겨자먹기로 자본을 동참시키고야 만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는 무역장벽이라는 더 강력하고 놀라운 채찍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 이 마법의 채찍이 단지 인증제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RoHS나 EPR같은 다른 환경규제 역시도 "일단 팔기 위해" 자본이  바싹 엎드리고 들어가도록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ISO 14001은 물론, 인증이 아니더라도 다른 환경제도들이 표방했던 것, 현실에서의 성과, 그리고 이들 제도의 정착을 위해 사라져간 것들이 있다. 사라졌으므로 선뜻 떠올리지 못하게 된 것들에게 최소한 "사라진 자들"의 이름을 붙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진행 중인 제도화의 흐름을 뒤집어보고, 국가와 자본이 제도의 이름을 빌려 내팽겨쳐버린 집단을 상기시키는 작업이 나한테는 중요해 보인다. 

글쓰기의 장벽에 부딪치면서 집어든 책이었는데, 오히려 주제를 확장시키는 사례를 던져주었다. Corporate Ethnography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STS에서 기업민족지들이 다루는 기술 개발 과정보다 훨씬 재밌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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