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처럼 말하고 싶다 - 이제민 신부의 자전적 신학 에세이
이제민 지음 / 생활성서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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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분처럼 말하고 싶다> 이제민(생활성서 2002)

'하느님의 언어에 바탕을 두지 않은 각자의 소리만으로는 누구와도 진지하게 만날 수 없다. 성령강림 날 체험한 이상한 언어는 소리가 아니라 언어이다. 그것은 다른 언어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시되, 인간의 수만큼 다른 언어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로 인해 하느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의 언어를 알아듣고, 다른 언어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복음을 자신의 언어로 알아듣게 된다.'(본문 151~152)

언어학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학자의 말이다. 한국 그리스도교회가 갖고 있는 시선에서 조금 비껴난 듯한 삐딱한 말이다. 그러나 이 얇은 에세이를 읽고 난 후의 느낌은 격렬한 파도 그 이후와도 같았다. 하느님의 음성을 대신 듣고 전해주는 성직자의 '신도'가 아닌 하느님의 입김을 통해 영혼을 받은 평등한 '신도'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글쓴이인 이제민 신부는 여기서 제사장의 통역을 거부하고 당당히 신과 대화하는 인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헛되게 오독한 결과일까? 인간이 잃어버린 하느님의 언어를 찾길 바라는 이제민 신부의 간절한 외침은 광야에 울부짖는 소리와 같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는 신학 또한 평신도의 신학을 주장한다. 그러기에 그는 불교의 원효대사에 주목하고 있으며 공통된 의미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 '신학의 무대는 '나'다. 바로 '내'가 삼위일체 드라마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다. '나'라고 하는 이 무대에서 하느님과 내가, 예수님과 내가 그리고 교회가 주인공이 되어 장엄한 드라마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본문 23~24)라는 문단의 글처럼 우리의 하느님에 앞서 나의 하느님을 먼저 의식하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다. 이런 주장은 그의 이력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무조건 믿음'의 계율을 거부하는 신학생 시절의 위험한 사고(?)가 얼마나 진보적인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리꾼이 막힌 목에서 피를 토하고 득음하듯, 그는 의심에서 신앙(또는 신학)의 진정한 진리를 찾았던 것이다.

하느님의 언어는 어떤 것일까. 하느님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여전히 다른 언어로 받아들이는 것은 역시나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무지는 아니였던가.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기도를 지어 가르쳐 주시며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우리는 이제 언어를 배워야 한다. 하느님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제 신학을 배워야 한다. 삶에서 대화하는 하느님 언어의 신학을 매 순간 학문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갈망한다. '그분처럼 말하고 싶다'는 간절한 기도로서 목마른 자의 목에 황금과 몰약보다도 값진 생명수를 부어줄 하느님의 언어를 갖길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다.
2003. 7. 24(목)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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