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쓸 수 있을까. 저 창문에 흔들리는목련 가지에 대해서,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대해서, 늦은 밤 귀가하는 이의 가난한발걸음 소리에 대해서, 갓 시작한 봄의 서늘한 그늘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쓰지못하고 누워버렸다. 여섯 살, 네 살 조카아이들을살피고 집안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체력은부족했다. 진득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딱 한 달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다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잠은언제나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 P23
나혼자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 혼자 바르게 산다고, 나 혼자 제대로 산다고 해서 변할 리가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분리수거를 철저하게하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집안일을 했지만 나의 노력은 너무 쉽게 보잘것없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내가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났다. 그게 잘 참아지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상황이었을 뿐이었다. 내가들인 노력에 적당한 대가를 받고 싶었다. 대가란고생한다고, 수고한다고, 그래서 고맙다는 마음이면 되었다. 말뿐이어도 좋으니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 P37
그러나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그러니까 3년 전부터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쓸 것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쓸 것들은 오히려많아졌다. 그러나 쓸 시간이 없었고, 머릿속을 정리할 공간이 없었고, 나에게 집중할 틈이 없었다. 이제는 조용히, 고즈넉하게, 쓸쓸히, 오롯이, 동떨어져서, 가만히, 차분하게 같은 단어들을 누릴 수없었다. - P56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절대 시간과 절대 노동, 절대적인 참을성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누구든 당연히 어렵고 고단한일이었다. 어미라고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 P77
그 사람과 나는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을까. 그걸 가늠하고 헤아리는 건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제 의미를 다하는 상태였다. 사랑하기까지의 시간과 사랑한다는 고백까지의 시간이 제일 황홀한 것도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 P88
아이를 키우는 건 그저 삼시세끼를 먹이는 일이 아니었다. 가르치고 보듬고이해하고 공감하는 것. - P113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앉지 마. 엄마가 하란 대로 하지도 말고, 그러곤 뚝, 통화가 끊겼다. - P117
더 늦기 전에, 정말 식구들에게 발목이 잡혀 땅에묻히기 전에. 나는 쉴 곳이 필요했다. 나는 도망칠곳이, 숨어 있을 곳이 필요했다. 적어도 식구들과거리감을 둘 공간이 필요했다. - P152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은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적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 P170
소설 속 인물이 겪는 환난은 보통 사람들이 어쩌면 배부른 투정으로 치부할 법한, 비극이라기보다는 그저 일생의 일부인 일상에 불과하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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