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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이상하게도 요즘 인류 멸종 위기에 처한 상황을 다룬 영화나 책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년초에 읽은 스티븐 킹의 '스탠드', '셀', '미스트'가 그러했고, 만화 7Seeds도, 영화 28일후, 클로버필드, 우주 전쟁 등도 대부분 바이러스나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인류가 멸종 위기, 죽게 될 위기에 처한다.
내가 광적으로 이런 소설이나 영화에 끌리는 이유는 위기의 순간에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는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숨겨져 있는 본성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 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나 혼자 살겠다고 도덕을 버리고, 양심을 버리고, 배반을 선택했을까?', '인간 지옥으로 떨어졌을까?'
아니면 '사건 초반에 맥없이 죽어버렸을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러한 소설 중에 가장 절망적인 소설을 만났다.
바로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
혹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나?
영화 전반에 흐르는 그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생각이 나는가? 사람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죽이는 차가운 청부살인업자와 그를 쫒는 보안관, 살해당한 사람들을 통해 미국 사회에 만연해 가는 범죄심리, 개인 이기주의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물론 나는 미국인이 아니기에 공감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지만, 전체적인 영화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꾸 자꾸 공포스러운 장면이 생각이 나더라.
바로 그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가 코맥 맥카시이고, 그의 신작이 '로드'이다.
작가만 들어도 책 전체의 분위기가 짐작이 가지 않는가?
짧게 압축하면 '지구의 대 재앙 이후에 길을 떠난 어느 한 부자의 이야기' 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다른 소설처럼, 영화처럼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살아남은 부자를 위협하는 것은 굶주림, 추위, 그리고 또다른 사람들이다.
모든 동식물이 죽어버리고 재만 남은 상황에서 겨울이 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버텨나갈 수 있을까? 게다가 식량이 없는 상황이라 사람들을 잡아다 식인까지 하는 무리들까지 있다면?
이런 암울한 분위기가 책 끝까지 지속된다. 먹을 것을 찾는 여정, 식인 그룹으로부터 도망가거나,
아들과 아버지의 짤막하고 우울한 대화들이 책 전체에 산개해 있다. 그들에게는 타인은 위험한
존재이고, 의지처는 서로 밖에 없다.
아버지가 제정신을 가지고 있게끔 해주는 유일한 끈인 어린 아들은 아직 세상을 모르기에 아버지는 늘 걱정이 앞선다. 모든 세상을, 타인을 불신하는 아버지에 다르게 순진한 아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한다. 읽는 내내 어찌나 답답하던지, 그냥 아버지와 아들 다 죽어버리는 것이 속이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옥같은 나날 속에서는 '어쩌면 죽음이 가장 편안한 휴식'이라는 생각까지 든 것이다
'지독한 절망 끝에 서다'라고 글 제목을 정한 이유는 이 책 줄거리 속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희망은 이 책을 읽고 우리가 찾아내야 할 숙제이다. 어쩌면 책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가 너무 어두운 나머지 내가 눈꼽만한 작은 희망의 불빛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희망은 단순히 글자 속에 있지 않았다.
내겐 척박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나가는 부자 사이의 인간애가 희망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남쪽을 향하는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여행이 희망이었다.
아마 이 두 부자와 같은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는 것, 모든 사람이 인간 사냥꾼은 아니라는 것 또한
희망이었다.
'세상이 자꾸 어두워져가더라도 마음 속에 희망이 있다면, 그 불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발견한 절망 끝에 찾은 희망은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