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물을 볼 때 본질을 보려는 노력을 하는 편이다.
누군가 어떤 주장을 하면, 그 주장의 내용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그 주장의 사회사상적 배경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길 좋아한다.
나의 행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행동을 하고 난 뒤 그 행동을 '복기'하면서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심리적 변화와 감정들의 변화는 어디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찬찬히 돌아보게 된다. 비단 사람의 의식과 행동뿐만 아니라, 조직을 볼 때나 어떤 업무를 대할 때, 자주 그 업무와 조직의 구조와 시스템(운영원리)를 보기 위해노력한다. 사회제도도 역시 그런 관점으로 보게 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한 사회나 시대에서 혹은 개인에게 철학이란 그 사람의 의식적 무의식적 행위를 발생시키는 '사고와 의식의 구조'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고와 의식의 구조'인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정연하게 정리되지 않거나, 뒤섞여 있을때는 엄밀하게 철학이라 부르기 어려운 '개똥철학'으로 존재해서 그렇지만...
우리가 철학자 혹은 사상가라 부르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언어를 발생시키는 '사고와 의식의 구조'가 보다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상호충돌이 적은 사람들이다.
한시대의 철학이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던 지배적인 '사고와 의식의 구조'인데, 중세시대에는 그것이 기독교와 봉건적인 사회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지금시대의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지배적인 '사고와 의식의 구조'는 아마도 자본주의와 상품적 생산과 교환방식일 것이다. 생산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사고 팔수 있다는 생각은 개인의 육체와 영혼, 사랑까지도 사고 팔 수 있다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와 의식구조'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행동을 긍정하고, 파생되어 나오는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는 이 '사고와 의식구조'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대부분의 자기의식은 '사회화과정'을 통해 형성한 것인데, 그것도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형성한 것이다.
예를 들어, 경쟁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사회 곳곳에 스며든 경쟁이라는 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들은 남들보다 자신이 뛰어날 때, 부모와 주위사람들로 부터 박수를 받고 인정받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레 남들보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더 예쁘고 .... 하는 비교와 경쟁의 '의식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다양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랐거나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원리'에서 자랐다고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서로 다 다른데, 성적을 매긴다거나, 얼굴의 미모의 순위를 매긴다는 생각자체가 우스운게 아닐까? 혹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에 손을 대거나, 타고난 운명에 칼질을 하는 것을 누가 긍정하겠는가?
왜 철학하기가 필요한가?
철학은 자신의 삶의 나침반이라고 했는데, 그 말도 잘 새겨보면 일리가 있다. 배는 바다에서 나침반에 절대 의존한다.
나침반이 가르치는 방향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나침반을 의심한다면 도대체 어디로 갈 수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문제는 이 나침반 자체이다.
이 나침반의 북극과 남극이 언제, 어떻게, 왜 그렇게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고, 다만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간다는 생각을 하게되면 이미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다.
철학하기란 자기 머리속에 들어 있는 나침반을 꺼집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침반의 북극과 남극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런다음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나침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런 다름 당신의 방향대로 열심히, 재미있게 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