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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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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식 ‘악의 연대기’의 끝판왕이랄까?
내가 읽은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은 <7년의 밤>, <28> 그리고 이번에 읽은 <종의 기원>
이 세개 소설인데 모두 혀를 내두를만한 '악인'이 등장한다. 그 '악인'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 서술했다는 <종의 기원>은
7년의 밤 오영제, 28 박동해를 이은 ‘악인’ 한유진의 ‘악의 발현기’ 또는 ‘살인일지’ 혹은 ‘사이코패스의 자기 변론서’ 같은 소설이었다.
말 그대로 한 인간의 ‘악의 기원’, 기원으로부터 발현, 진화의 과정을 모두 그려낸 것이 이 소설, ‘종의 기원’인 것 같다.
그런만큼 처음부터 피범벅에 피냄새를 뿌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정유정 소설이 모두 그랬듯이 ‘군도신도시’라는 가상 도시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역시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긴장감과 긴박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항상 가상의 도시가 등장하는데 이 철저하게 작가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가상도시가 소설의 배경, 무대가 돼서
이야기의 모든 요소를 최상으로 맞물려 돌아가게 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물, 바다, 섬, 고립된 지형, 안개 등 7년의 밤부터 익숙했던 장치들이 보인다.
P.66
비로소, 어머니가 영화관 안에서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 이유가 이해됐다. 내겐 신나고 짜릿했던 영화가 사실은 찜찜하고 무섭고 슬픈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어느 지점에서 무서워하고 슬퍼해야 했는지는 여전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P.105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해진이 얼마나 슬퍼하는지 충분히 느껴지는데, 그로 인해 귀가 다 먹먹한데, 가슴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해진의 울음에 어머니도 울고, ‘어른 보호자’를 만나러 온 간호사도 눈을 붉히는데, 나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로 인해 해진에게 위로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피투성이로 깨어난 시작과 다르게 일견 평범해 보이는 유진이 타인의 감정을 캐치해 내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면에서
조금씩 이상함을 느끼게 된다. 거기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유징이 자신이 그저 ‘솔직함’이 부족할 뿐이라고,
정직이라는 가치를 중시하지 않을 뿐이라고 서술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것이 ‘사이코패스의 자기변명’임을 확실히 느꼈다.
그런데 분명 사이코패스의 진술임에도 해진이 입양되는 장면,
일생일대의 대회에서 발작으로 기회를 놓치는 장면 등 불쑥불쑥 연민의 감정이 드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러다가도 10여 년간 같이 산 해진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실망하면서도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해진을 살해하는 점에서
유진, 너야말로 그 10년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냐고 소리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P.161
달리기는 군도신시로 이사한 후부터 꾸준히 해온 운동이었다. 목표점을 향해 전력 질주 한다는 점에서 수영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강과 바다를 교대로 바라보며 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심심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심장이 성난 사자처럼 날뛰는 것이 좋았다. 일상에선 그럴 만한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설레거나, 긴장하거나, 불안을 느끼거나, 감정이 격앙되거나, 쾌감을 느낄 만한 일조차도.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유진이 계속 수영을 했다면 이런 사태를 막고 계속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어릴적 자신을 추월한 아이를 꿈속에서 몇 번이고 죽이던 유진을 보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작가의 말
“인간은 살인으로 진화했다”
P.381
이 과정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때의 ‘특별한 악인’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유진’이 수정란의 형태로 내 안에 착상된 셈이다.
(중략)
‘유진’을 여러 형태로 그려낸 이유다. 등단작인 ≪내 신생의 스프링캠프≫에선 정아의 아버지로,
≪내 심장을 쏴라≫에선 점박이로, ≪7년의 잠≫에서는 오영제로, ≪28≫에서는 박동해로,
매번 다른 악인을 등장시키고 형상화시켰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목이 마르고 답답했다. 그들이 늘 ‘그’였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그려 보이는 데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결국 ‘나’여야 했다. 객체가 아닌 주제여야 했다.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줄 수 있으려면.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려면.
(중략)
이제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어둠의 일면이 분명 우리에게도 존재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것이 발화 되느냐, 발화되지 않느냐일 뿐이다. 그런 경고를 하는 것이 바로 ‘종의 기원’이다.
지금까지 이야기 주변에서 ‘악’을 그려왔던 작가가 이번에 확실히 '악'을 중심으로 끌고온 것 같다.
그렇다면 다음 작품은 뭘까? 인간 저변에 있는 '어둠'을 어떻게 더 묘사할까? 벌써 다음 작품이 기대되면서도 걱정된다.
차기작은 해양 재난 스릴러 라던데... 벌써 너무너무너무너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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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6
내내 덮어쓰고 있던 재킷 후드를 벗고 해진을 마주 봤다. 녀석의 눈이 노을 속에서 배시시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가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하염없는 두려움을 내 핏속에 쏟아넣는 사람이라면, 해진은 내 심장에 노을 같은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네 편이라고 말해주는 존재였다.
P.64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단둘이 있을 때의 해진은 나와 가장 친한 것 같았다. 단둘이 있을 때 어머니 역시 그랬다. 오로지 나만 바라보며 사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나는 늘 차 순으로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점에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 내가 쪼잔한 놈처럼 느껴져서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P.108
나는 10년 전 고아가 된 해진을 끌어안으며 보여준 어머니의 3차방정식을 떠올렸다. 지금 내 목 밑에 억눌린 서늘한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 것도 같았다. 외로움일 것이다. 그때의 해진과 다른 게 있다면, ‘너의 외로움을 안다’고 말해줄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이고.
P.139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P.188
그날 밤, 오뎅과 발맞춰 걷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해독의 실마리를 찾았다. 더하여 내가 무엇에 끌리는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겁먹은 것에게 끌렸다.
P.226
혜원은잊어버리지말라고경고했다. 유진이 인생에서 중요한 건 수영 챔피언이 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무해하게 살 수 있느냐 아니냐, 라고.
나는승복할수밖에없었다. 내 삶의 목표, 혜원이의 치료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무탈하고, 무해한 존재로 평범하게 사는 것.
P.243
약을 끊으면, 본래의 내 몸 상태로 돌아온다는 사실은 경험으로 익히 아는 바였다. 본질적인 상태에서 남과 다른 어떤 부분이 내 특성, 혹은 본성일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게 만든다면, 그리하여 삶에 특정한 영향을 끼친다면, 영향력이 커져서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면……. 문젯거리가 되겠지. 이모가 약을 쓴 건 그 때문이었을까.
P.259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P.292
탯줄을 잘라버린 기분이었다. 불가침의 국경을 넘어선 부랑자가 된 것 같았다. 국경 너머에 두고 온 건 아마도 나일 것이다. 세상 속에서 사람과 함께 살아온 나, 지상에 단단하게 발을 붙이고 있다고 믿었던 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나면 돌아갈 길이 없다.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부옇게 흐린 저 겨울 대기 속으로 계속 걸어가는 것 말고는.
P.324
일기인지 메모인지의 속지를 그 위로 밀어넣었다. 한 장이 다 타면 다시 한 장을 밀어넣는 방식으로 시간을 들여 기록을 모두 태웠다. 어머니의 기록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산 채로 화장시킨 기분이었다. 잿불 위에서 돌아갈 길 없는 이전의 삶들이 너울거렸다.
P.347
결국 결정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해진이냐, 나냐. 답은 자명했으나 선택이 쉽지는 않았다. 내게 ‘감정’이 존재하는 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감정을 없애면 선택의 무게는 신발을 사는 일만큼 가벼워진다. 목적과 비용의 상관관계만 따지면 될 테니까. 문제는 상대가 신발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해진은 내게 순전하고도 온전하게 감정적인 존재였다.
P.361
얼굴이 곧 화면이었던 해진은 이제 내 앞에 없었다. 친구이자 형제로 살아온 10여 년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층처럼 단단하게 쌓였다고 믿어온 것 역시. 믿음, 배려, 이해, 연민……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수렴되는 수많은 감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