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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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수첩, 신발, 가방, 책, 음악과 같은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들을 모티프로 하여

거기에 담긴, 또는 관련된 ‘사연’을 들려주는 6가지의 이야기.

문득 든 생각인데 단편 소설의 매력은 ‘아 그래서 어떻게 되는거지?!!’ 할 때 끝난다 것 아닐까ㅎㅎㅎ


작가의 말

P.211

일종의 ‘표제소설’이라고나 할까. 술, 옷, 신발, 가방, 책과 사진, 음악. 늘 가까이하는 사물들에 관한 여섯개의 이야기이다.

친근한 사물들이 어떤 낯선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상상해보는 게 재미있었다.

작가의 말처럼 그런 일상적인 것들에서 이야기를 끌어내고 또 그런 일상물을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여서

인물이 처한 상황을 은유한 것이 참 재밌기도 하고 대단했다.



각 소설은 당연히 다른 이야기였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나 느낌이 닮아있었다.

중구난방 여러가지 이야기를 한다는 것 보다는 한 방향을 계속 응시하면서 차분하게 나아간다는 느낌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표정을 감추고 ‘거짓된 진실게임’을 하면서 상대에게 속마음을 보이지 않거나

‘현실을 수긍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입장과 한계를 정하는’ 고립되고 단조로운 삶을 살아간다.

각 이야기가 비슷한 분위기라고 느끼게 된 데에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가진 삶의 태도가 서로 닮아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 있느냐’고들 하는데 그 ‘사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런게 아닐까 싶은 소설이었다.

라디오에 신청하면 뽑혀서 읽어줄 것만 같은 그런…?

소설마다 분명 고난이나 불운이 찾아오지만, 아주 절망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도, 엄청난 행운이 찾아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닌,

아주 밝기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아주 어둡기만한 이야기도 아닌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늘 안 좋은 일이 찾아오고 불운한 것 같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늘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고

지나고나서 보니 ‘그런일이 있었지’ ‘그런 일도 일어나네’하고 돌아보게 되는 그런 우리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읽고나서 처음엔 약간 ‘음…?’ 하는 오묘한 느낌인데

문득 곱씹을수록 ‘아..!’ ‘그래 맞아…’ 하면서 한 뼘씩 이해가 깊어지는 그런 소설이었다.

탄산음료처럼 빵빵 터지며 눈물, 콧물, 웃음을 뽑아내는 그런 소설은 아니지만

차 처럼 서서히 우러나오는 은근한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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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4


“위스키는 숙성시키는 동안 매년 2퍼센트에서 3퍼센트 정도가 증발하죠. 그걸 ‘천사의 몫’이라고 불러요. (중략)”


“천사들은 술을 가리지 않아요. 모든 술에서 공평하게 2퍼센트를 마시죠. 사람의 인생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되는 게 있다면,

천사가 가져가는 2퍼센트 정도의 행운 아닐까요. 그 2퍼센트의 증발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군요.”


 


P.65


그런 일 역시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이 세상의 부당함은 정교하고 완고하게 위와 아래가 짜여 있어 마법이 풀리는 반전 따위는 생겨나지 않는다.


 


P.100


어릴 때는 삼십대면 굉장히 늙은 줄 알았어. 이렇게 모르는 게 많고 가진 게 없을 줄은 몰랐지. 내 인생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P.105


그녀는 다시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는 모든 게 다 진짜였는데. 그건 다 어디로 갔을까.


 


P.126


그는 스스로를 자신이 아는 범주 안에서 작은 규모로 삶을 꾸려나가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참을성과 조심성이 많고 자신이 속한 조건에 대체로 불만을 품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잘 맞추고

또 인생의 나쁜 점을 피하는 법을 아는 온화한 성격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단지 겁이 많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만을 상대해왔으며 정체를 모르는 것을 집에 들여온 적이 없었다.

그가 발붙이고자 했던 세계의 외곽에서 쫓겨났을 때, 그리고 돌아갈 거처를 찾아야 했을 때도

그는 뭔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몸을 움츠린 채 시간의 불연속선 위를 떠밀려왔는지도 몰랐다.


 


P.157


굳건한 동행이었던 존재가 책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버려야 할 짐이 된다는 데에 어쩔 수 없이 착잡함이 밀려들었다.


 


P.168


나쁜 뉴스를 보고 내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면 남의 행운 역시 부러워해서는 안된다.

지금 역시도 그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큰 행운이 없었으니 0.01퍼센트의 불행 또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대체 이처럼 비겁한 자기위안의 논리로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박탈감에 굴복해왔던 것일까.

식은 밥 같은 중간지대의 안전이 그에게 남긴 것은 고독뿐이었다.


 


해설- 황정아


P.199


대체로 은희경의 소설에서 한번 깜빡이는 순간의 삶의 밀도를 실감하는 것은 독자에게나 주어진 호사이다.

이런 삶이 아니어야 했는데 결국 이런 삶이 되어버렸어, 라는 희미한 탄식이 어울릴 인물이 그녀의 소설에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앞서 말한 ‘삶은 이런 것이다’에 덧붙여져야 할 소감은 ‘삶이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라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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