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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고 네 살 어린 총각과 재혼한 엄마에게 배신감을 느끼던 준호는
절친 규환의 부탁으로 ‘운동권 핵심 인물’인 규환의 형, 주환의 도피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야밤에 광주로 가는 막걸리 트럭 짐칸에 올라탄 준호는 그러나 뜻밖의 방해꾼들을 맞이하게 된다.
어딘가 수상한 어부 할아버지와 개장수 아버지에게 매 맞는 아이 정아, 정아네 사냥개 루스벨트 그리고 막걸리 트럭의 주인집 아들인 승주까지.
어쩌다보니 같이 떠나게 그들은 말 그대로 ‘개고생’을 하며 목적지로 향하는데…… !
이렇게 4명의 사람과 한 마리가 떠난 어떤 모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약간의 시대적 상황과, 엄마의 재혼, 가출, 도망 등등
심란한 중학생들의 개인적 사정이 얽혀 시작된 여정은 생각보다 다사다난했다.
준호가 화자라 그런지, 준호의 시점으로 봐서 그런지 승주의 민폐짓, 뻔뻔함에 어찌나 열이 받던지…!
엄청 감정이입해서 뒷목잡고 쓰러질 뻔 했다...후...
그러나 덕분이라 해야할지…승주 덕분에 정말 싱겁게 끝났을지도 모를 여정이
개고생 직살나게 하는 대 서사시가 되었으니 소설을 진행시키게 하는 인물이라 해야겠다.
모험만 있느냐 하면 그렇진 않고 나름 15살의 풋풋함도 곳곳에서 보였다.
사흘간의 짧은 모험이었지만 차차 성장하고 마음을 나누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여 흐뭇했다.
어느새 보니 준호와 같이 원통해 하다가 억울해 하다가 민망해 하다가 어이없어 웃고 있었다.
P.292
그 옛날, 아버지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진구렁에 발을 딛고 있어도 눈으로는 별을 만져야 하는 거야.”
끝내 주게 멋진 말이라 생각했다. 내가 눈으로 별을 만질 수 없는 것은 우리 동네에 진구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진짜 진구렁 속을 걷던 그때, 내 눈은 무엇을 만졌던가. 별은 아니었다. (중략)
닥치는 대로 미워하고 저주하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나자, 한 가지 의문만 남았다.
나는 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얼마 후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미움과 증오, 왜 이 길을 가는가에 대한 의문도 사라졌다. 생각 자체가 사라졌다. 몸은 이제 관성으로 움직였다. 머리와 몸의 교신이 끊긴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수레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도 쉬자 하지 않았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들처럼 느릿느릿 쉼 없이 나아갔다. 그때 우리에게 나아가는 것 말고 어떤 길이 있었겠는가. 멈추기만 하면 그 자리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데. 앞을 가로막은 산에게 넌 왜 하필 거기 있느냐고 따져 봐야 입만 아플 텐데. 산은 비켜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야 했다. 진구렁 황톳길이 그것을 혹독하게 가르쳐 주었다.
P.302
황톳길과의 싸움은 다섯 시간을 꼬박 채웠다. 그래도 우리의 길고 고통스러운 여정에 신의 가호가 있었음을 믿는다. 비바람은 과열된 체온을 식히고 갈증과 탈진을 막아 주었다. 비바람 때문에 길이 험했으나 덕택에 우리가 진구렁에 쓰러져 눕지 않았고 비바람으로 인해 길과 산이 텅 비어 있었다. (중략)
해가 쨍하게 떴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인생의 뜨거운 맛을 제대로 봤을 거다.
이들이 가는 길이 험했던 것은 인생길의 모짐을 은유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리기만 했던 15살 아이들이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는 장면이지 않았을까.
한 가지 놀랐던 것은 이렇게 결말이 확실(?)할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이야기로 끝날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서의 이야기까지 있었다.
스프링 캠프라고 귀엽게 부르기에는 생각보다 거친(?) 모험이었지만, 주인공들이 15살 이라 그런지,
청소년 소설이라 그런지, 아니면 아주 초기작이라 그런지 여튼 「7년의 밤」「28」「종의 기원」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오히려 「내 심장을 쏴라」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내 심장을 쏴라」의 청소년 버전이랄까?
이렇게 보니 확실히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부터 「종의 기원」까지 분위기도, 이야기의 주제도 서서히 발전하고 있는게 확실히 보인다.
그러나 정유정 작가 특유의 속도감 있는 문체와 긴박한 상황묘사들은 그대로였다.
롤러 코스터를 타듯 초반에 서서히 올라가다 절정부터 끝까지 쭉 끌려내려오게 되는 것이 중간에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든다.
한마디로 재밌었다는 소리!
자신의 진짜 인생을 이제 막 시작해보려는 아이들이 겪는 혼란과 갈등, 설렘이 모두 담긴 소설이었다.
◆◆◆
P.168
트럭 가까이 다가가자 할아버지가 정아를 붙잡아 올렸다. 승주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 녀석의 커다란 손이 그토록 미더웠던 적이 또 있었을까. 그 손은 단 한 번의 동작으로 가뿐하고도 안전하게 나를 끌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루스벨트가 뛰어올랐다. 트럭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거리를 빠져나갔다.
P.200
호수 –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뜩함 사이에서
더욱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들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랑이여
이 어쩔 없는 그리움이여.
P.251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한테 받은 선물이랍니다. 돌려주고 물어보면 공손해질 겁니다.”
잠시 후, 모자가 승주에게 돌아왔다. 승주는 입을 비쭉대며 모자챙을 턱까지 내리눌렀다. 나는 조금 어색해져서 지프를 살피는 척했다.
P.268
“가자.”
정아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림받은 적이 있는 사내아이와 버림받기를 원하는 여자 아이는 나란히 논두렁을 걸어갔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P.292
그 옛날, 아버지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진구렁에 발을 딛고 있어도 눈으로는 별을 만져야 하는 거야.”
끝내 주게 멋진 말이라 생각했다. 내가 눈으로 별을 만질 수 없는 것은 우리 동네에 진구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진짜 진구렁 속을 걷던 그때, 내 눈은 무엇을 만졌던가. 별은 아니었다.
(중략)
닥치는 대로 미워하고 저주하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나자, 한 가지 의문만 남았다.
나는 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얼마 후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미움과 증오, 왜 이 길을 가는가에 대한 의문도 사라졌다. 생각 자체가 사라졌다. 몸은 이제 관성으로 움직였다.
머리와 몸의 교신이 끊긴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수레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도 쉬자 하지 않았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들처럼 느릿느릿 쉼 없이 나아갔다. 그때 우리에게 나아가는 것 말고 어떤 길이 있었겠는가. 멈추기만 하면 그 자리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데.
앞을 가로막은 산에게 넌 왜 하필 거기 있느냐고 따져 봐야 입만 아플 텐데. 산은 비켜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야 했다. 진구렁 황톳길이 그것을 혹독하게 가르쳐 주었다.
P.302
황톳길과의 싸움은 다섯 시간을 꼬박 채웠다. 그래도 우리의 길고 고통스러운 여정에 신의 가호가 있었음을 믿는다. 비바람은 과열된 체온을 식히고 갈증과 탈진을 막아 주었다. 비바람 때문에 길이 험했으나 덕택에 우리가 진구렁에 쓰러져 눕지 않았고 비바람으로 인해 길과 산이 텅 비어 있었다. (중략)
해가 쨍하게 떴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인생의 뜨거운 맛을 제대로 봤을 거다.
P.323
나는 웃고 말았다. 웃고 나자 불안이 10센티미터쯤 달아났다. 정아도 따라 웃었다.
“돌아갈 수 없을 땐 돌아보지 마. 그게 미친 짓을 완수하는 미친 자의 자세야. 오케이?”
P.334
나는 좌현등의 붉은빛 속으로 쏟아지는 빗줄기와 포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핏빛 눈보라가 짓쳐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정아는 무릎을 싸안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승주는 갑판에다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지만 꿰뚫어 볼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기억에서 우리 앞으로 뛰어나온 세상과 삶과 사람들, 그 황량함을 감당하지 못해 하얗게 질려버린 서로의 모습을.
P.364
어느 순간, 그들은 바다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하나, 둘, 셋……. 차례차례 내 심장으로 들어왔다. 모두 들어왔다. 그사이 세상은 멈춰 있었다. 바람과 파도, 대기의 움직임과 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나 자신의 존재감마저 잊었다. 절벽의 한 부분인 양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약속한 듯이 그랬다. 어쩌면 말을 하거나 움직여서 우리 안으로 막 들어온 그들을 놀라게 할까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P.381
푸름 마을을 지나오며 안개섬의 새벽을 생각했어. 우리가 봤던 낯선 것들, 아름다운 것들, 빛나는 것들. 아니 어떤 말도 그들을 칭하는 데 적당하지 않을 거야. 세상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던 그들을, 나는 그냥 ‘비밀’이라 부르기로 했어. 내 인생의 첫 비밀. 어쩌면 우리가 함께한 며칠은 우리 인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법을 가르친 신의 특별한 수업이었는지도 몰라.
세상에는 신이 내 몫으로 정해 놓은 ‘비밀’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그렇다고 동의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