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일단 제목부터 참 좋다.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되는 경우 제목에 비해 실망하기도 하지만 이번 책은 좋았다.


제목출처는 김종삼 시인의 ‘어부’라는 시라고 한다. 시도 참 좋다.

 

어부 -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여 교수’하고 하면 떠오르는 우아하거나 깐깐한 이미지가 있는데 장영희 교수는 전혀 반대의 성품이셨던 것 같다. 약간 허술하시면서도 진솔하고 유쾌한! 소아마비에 장애인, 여러 번의 암투병...어찌보면 참 기구한 인생으로 끝날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참 많은 일을 이루어내셨다.

진부한 질문이지만 '내가 그런 환경이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막막하기만 하다...

 

에세이가 원래 그렇겠지만 주로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50이 넘어서도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을 보니 원래 삶이란 알기 어려운 것인가 보다. 지금 삶과 나 자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는 조금 위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 다른 장르와 달리 작가의 성향, 한 인간의, 한 사람의 삶과 생각이 담겨있고 그것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 매력인 것 같다.

본인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괜히 타인의 삶을 한 번 기웃거려보고 싶어지는게 인간이니까.

 

글 자체는 투박했다. 화려한 미사여구나 세련되기 위해 노력하는 문장 대신 진솔하고도 투박한 글이었다. 마치 작가 본인처럼.

2009년에 결국 간암으로 돌아가셨다는데 참 씁쓸했다. 제목처럼 ‘살아갈 기적’이 좀 더 많았으면 좋았을 것을…….

책을 읽었다기보단 많은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눈 느낌이었다. 덕분에 내가 살아온 기적을 돌아보고 내가 살아갈 기적을 꿈꿀 수 있었다.


◆◆◆​

 

 

 

 

P.105

“이모, 파리에도 개선문이 있고 로마에도 개선문이 있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개선문이 없어?”

순간 나는 답변이 궁해졌다.

“우리나라에는 대신 동대문, 남대문이 있잖아.”

“아, 그럼 동대문, 남대문이 개선문이야?”

“아니, 개선문은 아니고 그냥 대문이야.”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정복한 적이 없고 고래 싸움에 새우 역할만 했으니 개선문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P.118

그 여자의 말에 나는 적이 놀랐다. 단지 다른 사람의 눈길을 느끼기 위해서 그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다니. 나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덕에 누구나 다 쳐다보는지라 남의 시선이 별로 달갑지 않은데, 그 여자는 그 시선 때문에 그 많은 노력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그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부러워서이고 나를 쳐다보는 것은 불쌍해서라고 하겠지만, 내가 살아 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는다.

 

 

P.120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만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한 것은 몽땅 다 망했지만,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P.140

또 어떤 청취자는 자신이 어떤 일을 했을 때 한 후배가 “사람이 되십시오”했는데, 그것이 자기 삶의 모토가 되었다고 했다. ‘사람이 되십시오.’ 사람이면 사람으로서의 기본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며 사람답게 살라는 말이다. 아주 중요한 말이고 좋은 충고지만, 사실 나는 그 청취자의 인품에 더 감동했다.

사람이 되라는 말은 지금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전제로 하는, 아주 모욕적인 언사가 될 수 있는데, 그것도 윗사람이 아닌 후배에게 그런 말을 듣고도 불쾌하기는커녕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 청취자는 이미 다시 ‘사람’이 될 필요가 없는 훌륭한 사람일 것이다.

 

P.141

“그렇게 야단법석 떨지 마라. 애들은 뼈만 추리면 산다.”

(중략)

아무리 운명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 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시간에 차라리 뼈나 제대로 추려라. 그게 살 길이다.

 

P.147

과거에 그들이 환상 속의 슈퍼맨이었다면 이제 그들은 진짜 슈퍼맨이 되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까지 이리저리 들추어내고, 그 상처가 없어질세라 꼭 끌어안고, 자신은 상처투성이라 아무것도 못 한다며 눈물 흘리고 포기하는데 이들은 여전히 꿈과 희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P.157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의사 선생님이 나오셨다. 아무 말도 안 하셨지만, 표정이 병호의 죽음을 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바로 그때,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던 명수가 깨어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 오줌 마렵다고!”

나는 친구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서 숨을 멈추었고 또 한 사람은 살아서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고 있었다.

(중략)

그리고 그날 이후 행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서 숨 쉬고, 배고플 때 밥을 먹을 수 있고, 화장실에 갈 수 있고, 내 발로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내 눈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고, 작지만 예쁜 교정을 보고, 그냥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니까 가끔씩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고, 친구들과 운동하고, 조카들과 놀고, 그런 행복들은 순전히 보너스인데, 내 삶은 그런 보너스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P.163

삶에는 달콤한 꿈, 야망, 낭만적 환상, 별, 달, 장미 꽃밭, 아름다운 숲, 향기로운 미풍, 연인과 만나는 호텔 스카이라운지, 아이들이 분홍빛 조가비를 줍는 백사장이 있다. 또 삶에는 실패와 배신, 위험, 좌절도 있고 찌개가 타는 부엌, 악을 쓰고 우는 아기,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들도 있다. 하나라도 더 팔려고 소리쳐 대는 시장 통에도, 노동자들이 등짐을 져 나르는 건설 현장에도, 어깨를 스치며 다니는 복잡한 거리에도 삶은 있다. 삶은 사람들이 울고 웃고 싸우고 상처를 주고받고 그리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곳이면 어디에든 있다.

 

P.196

아이러니컬한 것은, 나는 이제껏 나만 보고 살았는데, 열심히 나를 지키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나만을 보살피며 살았는데,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P.211

삶을 다하고 죽었을 때 신문에 기사가 나고 모든 사람이 단지 하나의 뉴스로 알게 되는 ‘유명한’사람보다 누군가 그 죽음을 진정 슬퍼해 주는 ‘좋은’사람이 된다면 지상에서의 삶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P.232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다, 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