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 청소년과 어른,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프리드리히 카를 베히터 엮음, 김경연 옮김 / 보림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필요에 의해서 그림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몇 권 읽었는데 그 중 '햄릿'을 소개한다. 그림책들 중 창작물도 많지만 고전을 아이들에게 쉽게 읽히기 위해 개작된 것들도 많다. '햄릿'도 그런 범주에 드는 그림책일 듯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깜짝 놀랐다. 그림책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원작인 세익스피어의 햄릿보다 베히터의 햄릿은 더 암울하고 비극적이다.
 

줄거리는 기본적으로 원작 햄릿과 (결론이 조금 다르지만) 동일하다. 등장인물은 햄릿, 크로디어스(숙부), 거트루드(어머니이자 현재는 크로디어스의 아내), 폴로니어스(재상), 오필리어(폴로니어스의 딸), 그리고 어릿광대와 곰으로 압축되어 있다. 어릿광대와 곰의 등장은 그림책이니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한 장치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런 이유만 있지 않다. 어릿광대와 곰은 원작 햄릿의 햄릿의 친구인 호레이쇼와 근위대원들, 그리고 연극을 공연하는 배우들 등의 여러 역할을 동시에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하게 햄릿의 또 다른 자아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베히터의 '햄릿'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어릿광대와 곰이 햄릿의 자아를 대신하면서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전혀 다른 '햄릿'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잘 알다시피 세익스피어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수다스런 캐릭터들이다. 세익스피어는 말들의 잔치고, 그 말들의 은유와 환유, 몰래 듣는 말, 오해하는 말들로 서사가 진행된다. 원작의 '햄릿' 역시 수다스런 캐릭터다. 그는 자기 심정을 다 떠벌리고 다니고, 연극을 하거나 거짓도 말하고, 고독도 독백으로 호소한다. 그런데 베히터의 '햄릿'에서 햄릿은 대사가 없다. 그는 내성적이고 고독하고 결국 복수도 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마음의 쇠사슬에 묶여 탑 안에 혼자 머물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된다. 오필리어와의 사랑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것도 모두 자기 마음 속에 가둬둘 수밖에 없는 햄릿이 됐다. 햄릿이 이런 캐릭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또 다른 자아, 수다스런 자아인 어릿광대와 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베히터의 '햄릿'이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가장 크게 달라진 지점이고, 세익스피어의 비극보다 훨씬 더 현대적인 비극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베히터의 햄릿에서 햄릿이 하는 말은 딱 세 마디인데, '오필리어', '쥐들이 바스락거려', '내가 찌르려던 건 다른 쥐였는데'가 전부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

세익스피어의 원작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사실 이 그림책은 동시대의 가족 이야기로 읽힐 수 있을 것 같고, 아마도 어린 아이가 읽으면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삼촌과의 결혼, 그리고 사랑하는 오필리어와 맺어질 수 없는 현대적인 비극으로 읽힐 것 같다. 원작을 읽은 독자라면 원작에 대한 재해석을 하면서 더 풍요로운 읽기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원작의 1막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숙부와 어머니의 결혼식이 끝난 어느 잔치, 햄릿은 어머니가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한을 풀어놓고, 이후의 여러 막에서 햄릿은 어머니와 숙부의 결혼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는데, 이 베히터의 햄릿에서 그런 모든 장면들은 단 하나의 씬으로 압축되어있다. 숙부와 어머니의 침대 아래에 몰래 웅크리고 누워있는 모습. 아이들 그림책으로는 충격적으로 느껴지는데, 원작의 햄릿이 어머니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며 갈등하고, 호통하고, 질러대는 고통이었다면, 베히터의 햄릿의 고통은 고독하고 내면화되어 있다. 

 원작의 햄릿은 오필리어를 아버지의 복수를 실천하기 위해 이용만 하고 이미 영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오필리어는 죽어 있지만, 베히터의 햄릿은 그녀에 대한 사랑도 아버지에 대한 복수도 실천하지 못하고,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만 죽인 채로, 마음의 쇠사슬을 채워버리고 만다. 오필리어는 햄릿을 찾아가 쇠사슬을 풀어주고 '이리와, 새야, 널 날게 해줄게'라고 말한 채, 자신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광인이 된다. 햄릿의 또 다른 자아인 어릿광대와 곰은 마음의 쇠사슬에 묶인 햄릿을 그대로 둔 채, 광인이 된 오필리어를 따라가며 베히터의 '햄릿'은 끝난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이 운명적인 비극이라면 베히터의 비극은 스스로 선택하는 비극이라 더 고통스럽다. 

베히터의 햄릿이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현대적인 새로운 비극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림책이 이렇게 강렬할 수 있다는 것에 이 그림책의 의미를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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