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시각과 미디어 동문선 문예신서 12
존 버거 지음 / 동문선 / 1990년 5월
평점 :
절판


이미지를 역사적으로 보기- 존 버거 <이미지> 서평

 

현대를 영상미디어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렸다. 광고 이미지들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건물 내부와 거리 곳곳을 점령했다.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어느 곳에서나 셀프카메라를 찍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모바일로 영화나 텔레비전을 감상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SF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현실 속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그것은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시각에 충격을 주기는커녕 우리 망막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하다.

이미지는 이제 단순히 보여지는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나를 보는 세계, ‘보는 나’라는 주체가 ‘보여지는 나’라는 객체로 변화되는 세계, ‘이미지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현실을 구조화하는’ 세계로의 변화. 리얼리티 쇼가 현실을 대체하고, 광고 이미지가 사람들의 꿈과 행복을 대체하는 명멸하는 빛과 그림자의 환영! 이미지를 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존 버거의 책 <이미지>는 이미지가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 본다는 것의 의미를 ‘현대의 역사적 의식’을 고양시키는 관점으로 서술한 책이다. 근대 르네상스 회화와 유화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현대의 광고이미지가 그 유화의 전통으로부터 무엇을 이어오고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저작이다.

 


 

존 버거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글을 시작한다.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와 보는 것 사이에 항상 존재하는 차이를 그의 작품 <꿈의 열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들이 사물을 보는 시각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또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위의 그림 <꿈의 열쇠>에서 말 그림 밑에 ‘문’이라고 텍스트를 적어놓았고 시계 그림 밑에 ‘바람’이라고 적어놓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말 그림을 봤을 때 그것은 그저 어떤 형상이었을 뿐 그것이 달리는 말을 그린 도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또 그림 밑에 적힌 ‘문’이라는 텍스트 역시 그것이 언어기호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형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우리가 믿고 있는 사실, 즉 현실세계와 재현된 그림과 언어기호의 관습적인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가령 텔레비전의 뉴스를 볼 때, 시청자는 찍혀진 영상과 자막, 그리고 앵커의 말이 결합된 뉴스가 그 자체로 사실이 아니라 현실의 어떤 단면을 영상과 음성과 텍스트들을 선택하고 편집한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게 된다. 이미지의 현실과의 유사성이 시청자의 사유를 압도하고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란 강력한 마술적 힘을 발휘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다른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보자.

필자는 청소년 미디어교육에 강사로 참여할 때 종종 이 그림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곤 한다. 이 그림을 보는 아이들의 첫 번째 반응은 “그린 사람이 세상에 불만이 많다”거나 “삐딱하게 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 등등이다. 조금씩 힌트를 주면 일부 아이들이 “저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에요”라고 말한다.

그것이 이미지를 보는 방법의 첫 번째다. 모든 것은 그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미지들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각각 고유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시간에 어떤 장소에서 제작한 재현된 이미지라는 사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이 출발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그 이미지가 현실을 얼마나 잘 재현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이미지가 어떤 물질적인 토대에서 역사적으로 위치지워지며 또 그것을 보는 감상자와 만날 때 어떤 의미작용을 하는가이다. 

존 버거는 “본다는 것은 그것과 자신과의 사이에 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라고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역사 속의 이미지가 어떤 현실을 구성하는가이다. “특권층에 있는 소수 지배계급이 그 역할을 정당화하려는 역사를 만들기 때문에 과거의 예술은 신비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왜 과거의 모든 예술이 이미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는가, 라는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관건이다.” 모든 예술작품과 그것을 둘러싼 담론, 그리고 현대의 매스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특권층의 소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몇몇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 권력관계에 맞서고 신비화를 거부하는 저항과 실험정신으로 살아 당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후에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대부분의 주류 예술작품에 대한 것이다. 먼저 유화의 소유형식에 대한 분석을 살펴본 다음 현대의 광고 이미지에 대한 분석을 살펴보겠다.

르네상스 이후 유화의 소유형식에 대하여

크게 구분하여 유화시대는 르네상스시대 그러니까 1500년경부터 시작해 입체파가 등장하는 1900년경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화 전통의 규범은 아직도 회화 규범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고와 영화 등 현대의 미디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느 시대의 예술이나 그것은 그 시대의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경향을 띠고 있는데 “재산과의 교환이라는 새로운 형태에 의하여 결정되는 어떤 세계관을 유화형식이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더구나 유화 이외의 시각예술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화가 전달하는 외관의 환영” 그러니까 “유화 이미지는 2차원에 속하지만 그 3차원의 환영을 출현시키는 힘은 조각보다도 더 강”한데, 유화는 대상이 색채나 촉감이나 온도를 가지며 그것이 만질 수 있는 물질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유화가 축복하였던 것은 그런 물질적인 재산을 가진, 커다란 구매력을 전제로 한 격동적인 새로운 재력의 출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각적인 초점은 구체성, 즉 감상자의 촉각에 그림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응할 수 있는가에 있다.

 


 

위의 그림은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그림이다. 그림의 소유자이자 주인공인 대사들의 거실과 장신구들, 그리고 그들이 입고 있는 의상 등은 그들의 소유물과 재력을 보여주며, 왼편 인물 옆의 지구본은 그들이 제국주의적인 권력을 가지고 이 세계를 소유하고 있는 계급임을 암시한다. 또한 이 그림에서 주목해 볼 것은 두 인물이 이쪽을 바라보는 태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외관상의 이미지가 타인에게 경계심과 냉정함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마치 타인들을 자신들의 세계로 축소시키려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다. 

존 버거는 이 그림 속에 존재하는 모순, 균열적인 지점을 두 가지 언급하는데 이것이 현대의 예술과 미디어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된다. 그림의 가장 앞쪽 아랫부분에 형체를 알기 어려운 두개골이 광학적으로 왜곡되어 보이는 물체가 보인다. 이것은 왜 그렸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유화는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물질성을 그 가장 중요한 특질로 한다. 하지만 신흥 귀족계급과 부르주아들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소유하고 싶었다. 그런데 만약 두개골을 다른 소재처럼 동일하게 그렸다면 그 형이상학적 의미는 소실되어 버릴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상징을 화면에 그려 넣은 것은 이 때문인데 그것은 유화화법과 충돌해 부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전통적인 유화인 종교화가 대부분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와 동일한 모순 때문이다.” 

존 버거가 주목하는 두 번째 유화의 모순은, 유화의 세계관인 “개인주의는 최종적으로 평등성을 긍정”하는데, 그러나 그림에서 “그러한 평등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위의 그림을 보면 “전경에 있는 어떠한 대상도 손을 뻗치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데” 동시에 격식과 위엄을 차린 딱딱하게 굳어진 어색함을 강조해야 하는 균열을 겪는다. 이것은 현대의 정치인들이 매스 미디어에 나왔을 때 그들의 태도가 보여주는 균열과 유사한 지점이다. 유화는 이런 이유 때문에 “공허한 느낌을 주며” “볼품없는 그림 같은 인상”을 주는데 역설적으로 그러한 “공허함이 그 그림의 권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생명, 광고 이미지

현대사회 속에서 광고 이미지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예술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라는 사실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존 버거는 유화언어와 비교하며 광고를 분석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현대예술과 시각 미디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시간’, ‘계급관계’, ‘행복이라는 이미지’이다.

첫째, 시간에 대하여. 광고 이미지는 항상 새롭고 현재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순간에 속한다. 그러나 광고 이미지는 결코 현재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광고는 미래(상품을 구매할 미래시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변신에 대한 꿈을 갖게 한다. 다시 말한다면 “매력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광고”이다. 그렇지만 광고는 “쾌락 그 자체에 대한 찬미가 아니고”, “구매자가 그 상품을 사서 매력적으로 변하게 될 그들의 미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유화가 그 그림의 소유자가 현실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통해 재력을 암시했다면, 광고는 그 광고의 감상자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통해 미래에 가지게 될 재력을 암시한다.

둘째, 광고는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계급관계를 암시한다. 존 버거는 이에 대해 “유화언어가 그 그림의 소유자에게 현실의 계급관계에 있어서의 우월성을 물질성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광고언어는 소비자가 그 상품을 소유했을 때에 가지게 될 계급관계를 물질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때문에 광고 속 상품의 실질적인 사용가치보다 브랜드 가치가 더 중요해진다. 이 브랜드의 상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만큼 계급관계의 우월성을 가지는 것이다.

 

 

 


 

유화언어가 단순히 물질적인 부만이 아닌 정신적 가치,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광고언어 역시 그 상품을 소유했을 때 단순히 물질적인 부만 소유하고 있는 ‘졸부’가 아닌 사회적으로 권위있고 지적인 ‘상류층’의 이미지로 그려져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광고는 종종 과거의 예술작품을 인용한다. 광고 속의 예술작품(회화, 조각, 클래식음악 등)은 “비속한 물질적 관심을 초월하는 문화적인 권위, 위엄의 형태, 그리고 총명함”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광고는 거의 상반되는 두 가지 사항, 즉 경제력과 정신력을 동시에 기술하는 것이다. 

셋째, 광고가 전파하는 것은 계급관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행복한 삶과 관계된다. 현대사회의 소비자들이 상품을 구매하게 만드는 매력은 경제력과 정신력을 가지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인데, 그 행복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하여” 판단된다. 

그렇기 때문에 광고는 “현실 생활에 대하여 최대한 불만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이는 “그 사회의 생활양식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활에 대한 불만”이고 모든 광고는 그 불만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을 야기 시키는데, 그것은 “가진 것이 없으면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공포감”이다. 이 점에서 광고는 유화로부터 달라진다. 유화는 현실 속에서 가진 자들의 권력을 전달했지만, 광고는 현실 속에 부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환영을 만들며, 소비자가 현재를 살 수 없도록 박탈감과 공포감을 조장하는 것이다. 심지어 광고 속에 빈번하게 사용되는 성적인 이미지, 아름다운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는, 그 상품을 구매하지 못하면 자신이 성적으로 무능한 사람이고 원만한 연애관계와 가족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야기 시킨다. 그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능력과 성적인 매력이 동일시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적인 행복 추구는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의 추구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한편에서는 광고 이미지가 제공하는 사회적 조건이 개인에게 무력감을 주는 원흉이 되고 있다. 개개인은 현실 속의 자신과 이상(백일몽) 속의 자신과의 모순 속에서 생활한다. 광고에 의해 “백일몽 속의 수동적인 노동자가 능동적인 소비자”가 된다. 노동자로서의 자신이 소비자로서의 자신을 부러워하는 분열적인 상태가 발생하고 그것은 삶 전부를 통해 지속되는 것이다. 

“광고는 자본주의 문화의 생명이다.” 현대사회에서 광고 이미지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입을 것인가, 어떤 차를 운전할 것인가 등등의 선택은 단순히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인 선택이 됐고 궁극적인 행복의 척도가 됐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민주주의적인 이상이 반대로 광고에 의해 모든 비민주주의적인 것을 덮어버리는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광고는 혁명조차도 자신의 개념 속에서 바꾸어 버린다.”

무엇을 할 것인가?

존 버거의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대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을 제공한다. 또한 이미지를 제작해 보여주는 역사적 관점도 제공한다.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핸드폰, 디카, 캠코더로 우리는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필자가 장애인 미디어교육에 참여했을 때의 한 사례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주류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장애인에 대한 모든 이미지들은 불쌍한 장애인을 비장애인의 시혜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상물들이 대부분이다. 장애인 미디어교육에 참여해 자기 손으로 직접 자기 삶을 카메라에 담는 장애인들의 시선은 어떤 것일까?

그 중 심유경씨의 <시선>(http://www.420.or.kr/fest/mi/mi9.htm)이란 영화를 예로 든다. 영화는 한 장애여성이 집에서 외출해 지하철를 타고 명동 거리에 나가 쇼핑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거칠게 흔들리는 카메라로, 휠체어를 탄 장애여성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교통수단(지하철 리프트)과 일상적인 거리는, 지금까지 미디어를 통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너무 공포스러워 이 영화 속에 재현된 현실이 내가 함께 살고 있는 현실과 같은 현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물감이 느껴진다. 이 영상이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은 주류미디어의 장애인 이미지가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을 강화시키는 것과 충돌해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실천들이 모이면 이미지를 보는 방식, 더 나아가서는 세계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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