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주홍색 연구 (양장) - 1887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아서 코넌 도일 지음, 공경희 옮김 / 더스토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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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읽었던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를 다시 읽었다. 작년 겨울 내겐 추리소설 바람이 다시 불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느낀 건, 보르헤스가 코난 도일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건 바로 이래서구나, 였다. 한때 추리소설 애독자였던 적이 있지만 범죄 그 자체를 풀어나가는 이야기 구조에 집중해, 그 곁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그런 탓에 보르헤스가 본 것은 내게 보이지 않았다.



가령 이런 거다. 살인사건의 행방이 오리무중, 한 주요 참고인이 위험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한가하게 음악을 듣고 있던 홈즈가 왓슨에게 말한다. “다윈이 음악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아나? 인류는 언어가 생기기 전부터 음악을 작곡하고 감상하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지. 우리가 음악에 이토록 영향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일 거야. 이 흐릿한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셈이지.”



누군가를 추적하고 돌아와선 책을 하나 꺼내며, “어제 노점에서 구했어. <국제법>이라는 책인데 1642년 롤랜즈의 리에주에서 라틴어로 발행된 거야. 찰스 1세의 머리가 아직 어깨 위에 붙어 있었을 때 이 갈색 장정의 책이 나왔지. 겉장과 속편지 사이의 헛장에 구리올미 후테의 장서라고 빛바랜 잉크로 쓰여 있어. 윌리엄 화이트는 누군지 모르겠군. 필체에 법률가 내음이 묻어나는 걸로 봐서 17세기 실용주의 법률가인 것 같기도 해.”



사건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런 이야기들이 왜 나오는 걸까? 좀 더 가보자.



사건이 언론에 보도가 되는데, 주요 신문들의 기사를 요약해서 보여준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벽에 피로 글자가 쓰여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정치 망명자나 혁명가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보았다. 미국에는 무수한 사회주의자들이 있는데 피살자는 조직의 규율을 위반하여 추적당해온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 <스탠더드> 무법적인 학살 행위가 대개 자유당 정부 아래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런 사건은 대중의 정신이 혼란스럽고 모든 권위가 약화될 때 발생한다. <데일리 뉴스> 이것이 분명 정치범죄. 자유주의의 독선과 증오가 유럽대륙의 여러 정부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영국으로 수많은 사람이 오게 되었는데, 대륙에서 험한 일들을 겪지만 않았다면 선량한 시민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주홍색 연구>는 대략 200페이지 안쪽의 짧은 소설이다. 그런데 중간, 대략 100페이지 정도에 범인이 밝혀지고 심지어 잡혀버린다. 나머지 100페이지부터 다시 모르몬교도의 아메리카 대륙 이주와 정착 서사가 나오고 그 안에서 범인과 피해자의 윤곽이 드러나는 구조다.



홈즈는 살인현장을 보고 나와 왓슨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번 사건을 주홍색 연구라고 부를까 하네. 우리라고 예술적 용어를 쓰지 말란 법은 없으니. 빛깔 없는 삶의 실타래 속으로 주홍색 살인의 실이 엉켜 있어.” <주홍색 연구>의 영어 원제목은 ‘A Study in Scarlet’ 이다. 무슨 미학논문 제목 같긴 하다.



앞서 언급한 다윈의 음악 얘기, 17세기 법학서적, 언론의 보도 내용 등은 모두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은 후에 그 내용이 기억에 남아있는 독자가 많지는 않을 거다. 코난 도일은 왜 이런 이야기들을 썼을까?



다윈에 대한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음악이 아니라 마지막 문장이다. ‘이 흐릿한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유년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19세기말 영국을 이 흐릿한 세기로 그곳의 어떤 이들의 살인사건에는 그들의 유년시절로부터 비롯된 이야기가 있다. 이로써 이 살인사건은 현재 벌어진 어떤 개인의 일이지만, 그 개인의 과거에 얽히게 되고, 그것은 단지 한 개인의 과거가 아니라 인류의 과거, 역사에 연결된다.



17세기 실용주의 법률가의 <국제법>에 대한 서적은 영국의 제국주의, 또한 영국 안에 있는 다양한 이주민들의 역사와 연결된다. 모르몬 교도의 아메리카에서의 정착 과정, 그 안에서 벌어진 일, 그게 영국으로 오게 된 사연.



그래서 이 범죄에 대한 각종 신문에서 언급된 정치범죄, 사회주의와의 연관성 등도 이 사건이 벌어진 시대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주홍색 연구>가 발표된 1887년은 마르크스 사후 3년이기도 하다.



아마 보르헤스는 코난 도일의 홈즈라는 캐릭터보다는 코난 도일의 소설이 텍스트 그 자체인 역사와 만나는 지점을 봤던 것 같다. 보르헤스의 시점에서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을 다시 읽으면 재밌겠다, 는 생각을 해 봤지만 아직 그의 다음 작품들은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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