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춤추는 죽음 2
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올 겨울방학은 정말 짧게만 느껴진다. 이번만큼이나 사람들과 고립되어 있어 본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대신 그 층위와는 또 다른 간격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속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무거운 담을 쌓는다고 해도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있던 관계의 문제나 감정들이 반복되었다.
스피노자 였나:인간은 개체이기에 비극적인 것이다. 그건 죽음으로써 근원적 일자로 돌아가야만 극복될 수 있다…. 확실히 모든 관계와의 절망은 근본적으로 '내가 네가 아니기에'생긴 균열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실마리조차 발견하지 못한 씁쓸함을 삼키며 이제 다시 사회 속 나로 돌아가야 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도피. 몇 번이고 꿈꿔 왔는지 모른다. 지금도 여전히 떨칠 수 없는 몽상이다. 몽상이라기보단 언젠간 반드시 잡아야 할 현실로 여기고 있다. 꿈을 꾸는 것은 현실이 자신과 소외되어 있다는 의미 일게다. 무언가를 깨우쳐 갈수록, 진실을 알게 되고 보게 될수록 연마를 위해 공부로 애를 써보려고 할수록 내가 지금 처해있는 현실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점점 더 소외되고 있다는 단절의 불안감이 엄습한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주위의 관계 맺는 사람들이 들뢰즈를 모르는데 굳이 내가 찾아서 알 필요는 없다. 들뢰즈는 들뢰즈고 나는 나다. 부러 자기 소외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운다는 것이 긴밀한 누군가와의 단절을 전제로 해야 한다면 얼마나 슬프고 부조리한 일인가. 사람은 사회 속의 동물이고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데 소통할 상대가 전혀 없다면.... '자신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 지금 이 고립감은 과거에 무수히 넘지 못해서 반복되고 극복하지 못해 재현되는 한계에 다다른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쉬이 떨치우지 못하는 유아 같은 망상의 요인인가. 어쨌든 단절은 결국 존재의 죽음과도 같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유물론적 전략이 있다면 아마 인간과 인간 간의 연대, 세대와 세대 간의 연대에 있으리라. 삶이 있으려면 죽음이 있어야 한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내게 세계를 물려주고 갔듯이 나 역시 언젠가 후세에게 이 세계를 넘겨주고 가야 한다. 그래야 인류는 새로 태어날 생명들과 함께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며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이 점을 인식하고 아집을 버릴 때, 나의 죽음은 비로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삶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의미든 삶의 의미든, 그것은 오로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세대와 세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진중권<춤추는 죽음>
알맞은 시기에 정독하게된 죽음에 관한 미학 서적의 맺음말에서 깊은 진의가 드러났다. 인류는 많은 시간을 지나오면서 다양한 죽음의 방식과 태도를 보였었지만 결국엔 관계 속에서 삶(죽음)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일침을 가하는 구절이었다. 되돌이켜보면 이 휴식의 시간에 나는 무엇보다 '관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 더불어 최근 가까웠던 이의 죽음이 더욱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여파일까.
하지만 그 중요성을 의식하고 있음에도 멜랑콜리한 감성은 관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끊임없이 재생산해낸다. 바로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