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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들 - 희미한 질문들이 선명한 답으로 바뀌는 순간
김도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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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전 <기획자의 독서>와 <브랜드로부터 배웁니다>를 무척 감명깊게 읽었던 터라, 신작 또한 의심치 않고 구매했다.

처음엔 전작에 비해 임팩트가 다소 적은가 싶더니, 기록을 위해 여러 번 읽는 과정에서 어느새 책의 언어에 깊이 감화되었다.

이전 서적은 어떤 특정한 주제(독서 그리고 브랜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였다면,

이번 <기획의 말들>은 좀 더 넓게, 기획자로 살아가면서 기억하고 기록하는 여러 말들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언어'는 이 책의 커다란 축임에 틀림없으나, 내가 개인적으로 이해한 이 책의 거대한 테마는 바로 '태도'의 측면이다.

이 책은 '무엇을(what)'이라거나 '왜(why)'를 다루는 책은 아니다. '기획'이라는 명확한 무엇(what)과 직업에 대한 애정(why)은 이미 작가가 보유하고 있는 무언가다.

그 대신 '어떻게(how)' 기획을 할 것인지, 어떤 마음으로 일과 삶을 대하는지에 대한 작가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기획을 하는 과정에서, 혹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견지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중간중간 놀라우리만치 생생한 묘사에 무릎을 탁 치기도 했고, 내가 평소에 느끼던 부족함과 관련된 서술에선 반성을 하기도 했다.

'기획의 말들'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무척 섬세한 언어로 쓰여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되는 매력이 있는 글을 잘 쓰셔서, 김도영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기획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아도, 나만의 '-의 말들'을 찾아가고 싶으신 분들 모두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다.


https://blog.naver.com/darjeeling75/223948030623

‘기획의 말들‘이란 결국 기획 일을 하는 누군가가, 일에 대한 고민의 과정 속에서 발견한 소중한 말들을, 나의 생각과 경험을 곁들여, 내 삶 속에 또는 타인의 삶 속에 슬그머니 꽂아두는 작은 메시지 카드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누군가 지금 내게 필요한 말을 나에게 꼭 맞는 언어들로 건네준다면 우리는 눈앞의 고민을 풀어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를 얻게 되는 셈이니 말이죠.

그리고 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역량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좋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좋은 이야기가 퍼질 수 있도록 하는 능력입니다. 브랜딩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문장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래도 나름 이 일을 해오면서 느끼게 된 한 가지는 브랜딩이란 결국 우리 브랜드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게 우리 브랜드를 쓰는 사람들 각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란 사실이거든요. 그러니 애초에 이야기에 관심이 없고, 이를 하나의 서사로 완성해내는 데 욕심이 없다면 브랜드를 기획함에 있어 꽤 불리한 출발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입니다.

저는 훌륭한 서사란 사건의 지평선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길 때 그 사람의 모든 정보나 조건을 따지는 게 아닌 것처럼 좋은 이야기 또한 이를 둘러싼 규칙들을 무력화시켜서 단번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보거든요. 그러니 가끔씩 ‘그게 왜 좋아?‘, ‘이걸 왜 샀어?‘라는 물음에 뭔가 객관적인 증거들로 설명할 수 없는 가슴 벅찬 이야기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그러다 깨닫게 된 한 가지는 아무리 천지가 개벽하고 AI와 로봇이 우리 일상의 대부분에 관여한다고 해도 내 관점과 표현을 거쳐가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과정이 다른 사람의 능력이나 특정한 기술의 도움을 받기 전에 내 손에서 가장 먼저 다뤄지는 게 훨씬 값지다는 생각에도 이르렀죠.

내 삶은 지금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불러주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들을 어떤 방법과 과정으로 기억하며 숙성시키고 있을까. 아무리 좋은 삶이라도 촘촘하지 못한 기억의 그물을 가지고 있다면 내 이야기는 너무도 쉽게 나를 빠져나가버릴 테고, 뒤늦게 뭔가를 내보여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제야 부자연스럽게 짜 맞추는 고행을 반복하게 될 테니까요. 모쪼록 스테이풋 상태에 있는 것들 중 온전한 내 것이 될 수 있는 건 무엇일지를 확인하는 것만이 우리 인생을 억지로 만들어가지 않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타인의 반응을 섬세하게 확인하는 습관‘을 중요한 역량으로 꼽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기획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까지는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지점에 들어서면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나타나는 법이거든요. 그리고 이건 개인의 기량 차이라기보다는 정말 누가 어떤 부분까지 들여다보았느냐의 차이일 때가 훨씬 많습니다. 자신의 일을 진정으로 애정하는 사람,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사용하게 될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 이들이 갖고 있는 눈은 일반 대중의 눈과는 반드시 다른 지점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흔히 말하는 그 ‘한 끗‘이라는 차별화 포인트가 손끝이 아닌 눈 끝에 달려 있다고 굳게 믿는 편입니다.

세상엔 나름의 이유를 가진 나름의 방식들이 존재합니다.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봐야 비로소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한 줄로 요약하기에는 함축된 의미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말도 있는 법이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대할 때는 남들이 놓치기 쉬운 그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받아들인 다음 나만의 방법으로 맛보고 기억하는 과정이 빛을 발합니다. 무엇보다 기획 단계에서 이런 노력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귀한 역량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죠.

제 경험상 이타적인 사람들이 ‘우와!‘라는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줄 때가 많았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있으면서도 계단을 내려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늘 정체기를 맞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대신 성실히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맨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이야기보따리를 열심히 꾸리고, 고객들의 반 발짝 앞에서 그 스토리를 풀어놓는 사람들은 언제나 더 나은 것들을 만들어냈거든요.

만약 여러분 주변에 누군가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거나 다른 사람은 풀지 못한 난제를 해결했다면 그건 아마도 기존 것들을 집요하게 해체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까지 다 분해해본 뒤에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악한 다음 어떤 것들끼리 새롭게 결합시켜볼까 고민해봤다는 얘기죠.

혹시나 이 책이 여러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여러분 또한 각자의 말들을 한번 기록해 나가보면 어떨까도 싶어요. 거창하지 않아도 좋고 매끄럽지 않아도 괜찮으니 여러분을 둘러싼 세상 속에 존재하는 말들 중 하나를 골라 가벼운 대화를 시작해보는 겁니다.
더불어 그 이야기를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해준다면 아마도 여러분의 말은 전에 없던 힘을 가질 것이 분명합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나라는 사람을 진하고 또렷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말. 비록 내가 가장 먼저 하지 않았을지언정 내게 머물며 더 큰 가치를 갖게 된 말. 나를 한 뼘 정도 더 자라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도 충분히 성장시킬 수 있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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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 - 일이 내게 가르쳐준 삶의 품위에 대하여
후안옌 지음, 문현선 옮김 / 윌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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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는 20년간 택배기사, 물류센터 야간직, 자전거 가게 판매원, 주유소 직원 등 열아홉 가지의 직업을 거쳐온 작가의 직업 에세이다. ‘일‘이라는 보편적인 행위에 대한 통찰과 거쳐온 직업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 녹아있는 이 책으로 이해와 공감의 지평을 넓혀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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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사고 - 비우는 여백에서 만드는 여백으로
야마자키 세이타로 지음, 김영주 옮김 / 북스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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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여 있는 무언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남겨둔 공간',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 넘치는 공간’, ‘정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남겨둔 시간이나 힘’


여백이란 단순히 '무언가를 쓰고 남은 공간'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극히 창조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을, <여백 사고>를 통해 여러 번 되새겼다.


내게 주어진 공간 모두를 남김없이 채워넣는 일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때에도 그것이 늘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느꼈다. 수중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때로는 그 이상까지 꺼내버린 끝에 '기가 빨린' 상태로 맞이했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선연한 감각.


그럴 때마다 내 안의 100%를 쓰면 안 된다고, 늘 80%만 써야 한다고 말했던 김영하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신기하게도, 바닥까지 비워버려 더 이상 차오를 것 같지 않던 마음도 머리도 상황도, 얼마간의 여백 틈새로 스며들어 어느새 차오르는 경험을 한다.


야마구치 슈도 그렇고 이 책의 작가인 야마자키 세이타로도 그렇고, 일본 작가들이 이런 면의 통찰에 유난히 능하다고 생각한다. 일본만의 감각적인 비즈니스와 브랜드의 원천에는 이런 일관된 철학이 자리하는 것 같아, 본 받고 싶을 때가 많다.


어떤 뛰어난 깨우침을 기대하고 읽기 보다는, 세파에 부딪쳐 숨어든 나만의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혹은 의식적인 여백을 실천하기 위해 가볍게, 천천히 곁에 두고 읽기 좋은 책이다.


https://blog.naver.com/darjeeling75/223927970678

· 여백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다음 단계의 성장을 촉진하는 원점이 된다.
· 여백의 의미는 사물의 연결 방식 그 자체다.
· 좋은 여백이 좋은 전달 방식과 커뮤니케이션을 낳는다.
· 사물의 가치는 여백을 만드는 방법으로 결정된다.

사회에는 경험해보면 좋은 일들이 많지만, 하늘이 두 쪽 나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실제로 거의 없습니다. 반면 ‘해보고 싶은’ 일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포기했거나 억지로 지워버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차피 불가능하다며 해보고 싶은 마음을 어딘가에 가둬버린 경우입니다.

최초의 영감을 부정해서 좋은 결과로 이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또한 처음부터 자신의 영감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 연장선에서 판단하는 일에도 정밀도가 점점 더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판단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 자료를 읽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데는 시간을 들이지만, 정작 판단할 순간이 오면 단숨에 결정합니다.

‘내가 아닌 존재’라는 요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연성의 힘을 빌린다는 것,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힘을 믿는다는 것,그런 점들을 받아들이면서 나의 상상력과 세계가 넓어집니다. 문이나 창을 만들어 외부의 풍경을 받아들이는 차경借景의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진심으로 납득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애초에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결론을 찾아보자‘라는 정도의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면서 절망감이 짙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애매함은 대개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아이디어나 생각, 의견을 출력하는 입장에서는 ‘애매해도 괜찮다’라는 상황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자유롭게 발상을 떠올려 어중간해도 좋으니 일단 밖으로 내보냅시다. 이렇게 하면 새로운 자극과 시사점을 얻을 수 있어 한층 사고가 깊어집니다.

저는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때는 갑자기 안개가 걷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언제 그 순간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괴로워도 그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버팀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한때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의견이나 환경 따위는 아무 상관 없었습니다. 꿈은 절대축의 정점입니다. 거기에는 귀천도 없고, 크고 작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나 허가도 물론 필요 없습니다. 하고 싶었지만 포기한 것, 마음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것들을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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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 - 일이 내게 가르쳐준 삶의 품위에 대하여
후안옌 지음, 문현선 옮김 / 윌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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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에 읽었던 책중 가장 좋았던 책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고르겠다. 읽는 내내 일과 삶에 대한 깊은 울림을 주는 이 에세이에 깊이 매료되었다.

"올해 한 권의 에세이를 골라야 한다면 이 책이다"라는 이충녕 작가의 말처럼, 양질의 에세이로 추천하는 책이다.

에세이라는 장르의 매력을 생각해 본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구체적인 삶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며,

때로는 그 다름 안의 공통점을 포착해내고 때로는 그 판이하게 다른 삶 속에서 다른 세계에 대한 감도가 높아진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는 20년간 택배기사, 물류센터 야간직, 자전거 가게 판매원, 주유소 직원 등 열아홉 가지의 직업을 거쳐온 작가의 직업 에세이다.

'일'이라는 보편적인 행위에 대한 통찰과 열아홉 가지의 직업에 대한 무척 구체적인 경험이 녹아있는 이 책을 통해 공감과 이해의 작업을 함께 해낼 수 있다.

하나의 에세이 같기도 하지만,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읽다보면 사회학 내지는 인류학서로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다혜 작가의 말처럼 '구체적으로 치명적인' 노동을 돈으로 교환하는 일과 그 사이에 자라나는 자유에 대한, 때로는 추상적이고 때로는 구체적인 갈망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돈과 일을 맞바꾸는 구체적인 하루를 보내는 동시에 자유와 존엄함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런 보편적인 고민에서 피해갈 수 없는 모든 직업인이라면, 지구 반대편에 있을지라도 와닿지 않을 도리가 없는 책이다.

P.S. 책 자체도 좋지만, 이 책에 대한 작가들의 추천사도 상당히 좋고, 번역도 무척 잘 되어서 완성도가 높다.


후기 링크:

https://blog.naver.com/darjeeling75/223923082864

심해의 물고기는 눈이 보이지 않고 사막의 동물은 갈증을 잘 참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되는지는 내가 처한 환경에 좌지우지되지, 본성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업무 환경이 조금씩 나를 바꾸고 있음을, 더 조급하고 쉽게 욱하고 무책임하게 바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금껏 지켜왔던 기준을 지킬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졌다.

과연 택배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극소수일 것이다. 어쨌든 나와 내가 아는 택배기사는 누구도 일을 사랑하지 않았다. 노동의 가치를 느끼는 순간은 월급이 나올 때뿐이지, 고객의 기쁜 표정이나 감사의 말을 접했을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타인의 호의가 기쁘다고 해도 말이다.

‘인생은 나선형으로 상승한다‘는 말을 누가 제일 먼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절하고 생생한 비유다. 다만 상승의 폭이 무척 작고 속도가 느리다는 말이 빠져있을 뿐. 인생은 등장하는 이름과 형태만 바뀔 뿐 늘 지난날이 반복되고 우리는 과거에 만났던 사람을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만난다.

이제 나는 젊었을 때처럼 다른 사람에게 나를 증명하려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손해를 감수하려 하지도 않고, 겉과 속이 다르다는 오해를 살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충동은 맹목적이고 헛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기준에 따라 남을 판단하므로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진실함을 믿게 할 수는 없다. 반대로 진실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진실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흔히들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하는데, 지금 시대에 운명이라는 말은 거창하니 차치하더라도, 성격은 정말로 자신의 인생 행로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준다. 가령 내가 일해온 경력을 이야기할 때 내 성격적 요소를 빼놓으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때 내렸던 수많은 결정은 단순히 이해득실의 각도에서 저울질할 게 아니라 내 성격의 영향이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맥도날드에서 저녁을 먹은 뒤 기차역으로 갔다. 텅 빈 거리를 걷고 있자니 만사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렇게 과장된 감상에 젖지 않는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 진짜 고난을 겪어본 적 없는 내가 만사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하면 비웃음거리밖에 안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오후에 든 생각과 감정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세상에 태어난 게 꼭 행복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자유는 고도의 자아의식을 기반으로 추구하는 개인적 갈망과 자아실현이며 타인과 확실히 구분되는 정신이다. 나는 그런 자유를 동경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이 더욱 다양하고 다원적으로, 더욱 평등하고 포용적으로, 더욱 풍부하고 다각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이제는 내가 했던 모든 일에 감사하고, 당시를 생각하면 그리울 뿐이지, 불만이나 원망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예전에 들었던 그런 마음은 전부 내려놓았다.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원한의 무가치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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