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깔려있다. 공간은 마치 오래도록 이미지를 쌓아온 것 같다. 오랜 과거의 축축한 흙이 파헤쳐지듯, 어두운 것도, 섬뜩한 것도 있다. 시인이 표현하는 공간의 이미지는 내가 알고 있던 공간에 대한 이미지 위에 중첩된다. 이미지들이 공간 위에서 만나고 겹쳐지고 충돌한다. 그런 이미지들은 이야기성에 의해 묘하게 얽혀지는데 그것이 참 흥미롭다. 마치 여러 편집기술을 활용한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이 모든 것은 내가 한국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공간에 대한 인식 위에서 가능한 독서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압구정‘ ‘분당‘ ‘구로‘에 대한 그림이 전혀 없는 사람에겐 어떤 식으로 읽히게 될까? 나는 그러한 독서 경험 역시 이 시들의 좋음을 전혀 해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내가 본래 가진 이미지들과 시들의 이미지들이 함께 노는 경험을 했고, 이는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래서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 시들을 읽었으며, 어떤 다른 즐거운 경험을 했을지.
한 편, 한 편 아껴가며 읽었다. 읽고, 소리내어 읽고, 다시 읽었다. 나는 보는 것이 익숙한 시절에 나고 자란 아이라 말들이 쏟아내는 이미지들이 꼭 애니메이션 같다고 생각했다.오규원 시인처럼 되고 싶었다. 날카로운 눈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보다 더 날카로운 말들을 다듬어내는 솜씨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좋았던 건 아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