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우는 어떻게 해야 그가 저에게 아는 척하고, 친한 척하고 싶어 안달할지를 고민하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어떻게든 재윤의 입에서 팬이에요, 좋아해요, 라는 말을 받아내고 싶어졌다. 저 무심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보니까 더 그랬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그날의 일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티 내지 않기로 했다.
아, 근데 왜 자꾸 아는 척하고 싶지?
<1권, p.21>
1권의 초입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말하기, 듣기, 쓰기]가 <유명한 작가와 작가를 따라다니는 열성 팬>의 사랑 이야기라는, 흔한 클리셰의 소설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도입부만을 놓고 본다면 아무래도 작가와 팬 사이의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가 제일 먼저 떠오르니까. 사실 이 소설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와 동시에 작품 소개와 100자평, 마이 리뷰에서 간간히 보이는 '힐링', 치유' 라는 단어가 소설과 과연 어울리는가? 싶은 의문을 갖는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감상은 1장 내내 이어진다. 학교 생활의 많은 부분을 함께하면서 친해진 자신의 팬―강재윤은 한결같이 신은우에 대해 모르는 척, 처음 만난 선배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은우는 그런 재윤에 대해 의아함을 가지면서도 멋있는 작가처럼 보이고 싶어하고, 재윤이 자신의 팬임을 확인받고 싶어 안달복달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재윤에게 괜히 한 번이라도 더 시선이 가고, 마음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고, 재윤의 작은 몸짓과 가벼운 말 한마디에도 온 신경이 쏠려 밤잠을 설치는 은우는 우리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사랑에 빠진 주인공'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누가 보더라도 귀엽고, 설레며, 부담스럽지 않은 로맨스라 생각하리라.
그러나 재윤과 오랜 시간을 공유하게 되면서 점차 드러나는 은우의 형편없는 인간관계, 부정적인 평판은 글의 분위기를 사뭇 바꾸어버린다. 재윤을 만나 마냥 즐겁고 행복할 것만 같던 은우는 어디에도 없다. 자격지심과 피해의식, 악의로 가득한 동기들과, 그들이 키운 난잡한 소문과 오해는 은우가 가장 외면하고 싶어하던 상처를 무참히 헤집어놓는다.
자, 여기서 잠시 멈춰, 어떻게 이러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 우리의 주인수 신은우를 간략하게 알아보자.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살아온 신은우는 극심한 애정결핍에 시달린다. 타인에게 애정을 갈구하며, 사랑 받기 위해 부던히 애를 쓰면서도 자신이 상처 받을까 두려워 피상적인 관계에만 안주한다. 진실하지 않고, 애정을 주지 않는(못하는) 신은우의 행동에 사람들은 점차 나가떨어지고, 이러한 악순환의 반복에서 은우는 어쩔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와 함께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결국 우유부단한 은우는, 자신에게 악의적인 현실에서 도피만을 선택하고, 열등감으로 가득 찬 동기들은 그런 은우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고 오해하며 허구의 '신은우'를 만들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도와 달라고 말해 줘요."
"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은우는 심각한 분위기도 잠시 잊고 평소처럼 바보같이 되물었다.
"그 말 듣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재윤의 말은 아리송했다. 당황스러움이 은우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자 내내 무표정하던 재윤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오지랖 부리면서 도울 수 있게 해 줘요. 지금은 뭘 해도 참견하는 것밖에 안 되잖아. 그러니까 꼭 말해 줘요. 지금 말하기 힘들면 나중에라도."
<1권, p.130>
만일 현실에서의 이야기라면 답이 없는 상황에 한숨부터 터져나오겠지만, 명심하자. 우리가 읽은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다. 그것도 '성장' 이라는 꼬리표가 달랑달랑 매달린. 힐링·치유물 BL소설에서 공의 활약을 어찌 빼놓을 수 있을까. 은우의 시련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재윤은 슈퍼달링과 같은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두려워하는 은우에게 용기를 주고, 물밑으로는 은우가 해명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준다. 극도의 애정결핍에 사로잡혀 누구에게도 쓴소리 한번 내뱉지 못하던 신은우는 강재윤과 함께하고서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서 애정을 갈구하기를 그만둔다. 혼자 주저앉지 않도록 자신을 받쳐주는 재윤의 곁에서 오해를 직접 해명하고, 악의를 대등하게 받아치며 은우는 비로소 '말하기'를 배운다.
1권의 전반부는 은우의 성장을 다룬다. 미시적으로는 은우가 재윤과 친해지고 호감을 느끼는 과정, 재윤이 은우의 정체에 대해 모른 척한다는 복선이 조밀하게 깔려 있으나, 소제목 '말하기'를 꿰뚫는 핵심 주제는 분명히 은우의 성장, '말하는' 방법을 배운 신은우이다. 자칫하면 동정에 빠져 길게 늘어지며 지루할 수 있었던 부분인데, 작가가 잘 정돈해내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시점이 1인칭인 탓인지, 아니면 주인공에게 과도하게 이입한 건지. 은우가 절대적인 피해자, 선량할 뿐인 존재로 그려진 면은 약간 신경이 쓰였으나, 우리는 '성장소설'이 아니라 주인공이 성장하는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있으니 조금은 너그럽게 바라봐도 괜찮지 않을까.
*
자, 그럼 이제 1권의 후반부, 소제목 '듣기'를 파고들어 보자. '말하기'에서 은우가 '말하는' 법을 배운 사실을 고려하면 우리는 '듣기'에서 은우가 '듣는' 법에 대해 배우지 않을까, 간단히 예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한 자 한 자 글을 읽어갈수록 우리는, 은우뿐 아니라 다른 한 사람에게도 주목하게 된다. 1권의 후반부인 '듣기'는 인간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은우의 눈에도 확연히 드러날 만큼 혼란스러워 하는 재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확산되기 때문일테다.
"오늘 아버지 기일이었어요."
영영 제 얘기를 할 것 같지 않던 재윤이 입을 뗐다. 여전히 안겨 있는 상태로 말하는 거라 은우는 제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재윤의 목소리를 차분히 들었다.
"돌아가신 지 꽤 오래됐는데."
"……."
"괜찮다고는 말 못하겠어요."
<1권, p.226>
독자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핵심 사건은 은우가 재윤이의 가족을 만나는 부분이다. 재윤의 다정함은 화목한 집안에서 자란 특권이라고,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처럼 피해의식에 젖어 부러워하기만 하던 은우가 재윤 또한 쉽게만 살아온 인생은 아니라고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던 진심을 끌어내 보여주고, 재윤 또한 그런 은우에게 마침내 자신을 내보인 순간이기도 했다. 다정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다가가기 힘들었던 재윤이가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렸다. 은우는 점차 타인에 대해 듣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은우는 그런 재윤이 좋았다.
오히려 재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먼저 입을 맞춰 온 건 재윤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상처받은 것처럼 나가는 모습에 은우는 얼떨떨했다.
<1권, p.301>
하지만 녹아내렸다고 생각한 재윤은 은우에게 있어,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뒤죽박죽인 태도만을 보여준다. 은우가 타인과 있는 모습에 질투하면서도 은우에게 거리를 두고 밀어낸다. 종내 은우를 피해 다니기까지 하는 재윤의 반응은, 점차 재윤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보이기 시작한 은우와는 정반대의 행보였다.
"그 사람이 그냥 연애를 하고 싶어서 저랑 만나는 걸까 봐, 제가 잘해 주니까 한번 만나 볼까 하는 심정일까 봐 그래요."
<1권, p.330>
재윤의 말마따나 애정에 약한 은우니까, 은우의 감정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 탓이라 설명하기에는 분명히 과한 면모가 있었다.
물론 독자는 1권의 끄트머리에 덧붙는 강재윤 시점을 읽고서 이 녀석의 태도가 오르락 내리락 널을 뛰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다. 무난한 배경, 무난한 집안에서의 무난한 삶. 마음껏 여유롭고 배려심 많을 수 있었던 무사태평한 인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큰 '상실', 즉, 아버지의 죽음은 단지 열여덟일 뿐인 어린 재윤의 상당 부분을 바꾸어버렸다. 소중한 존재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곁에 있던 모든 이들을 밀어냈다. 아무도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도록, '상실'을 줄 수 없도록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게 되었음을,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나오지 않게 되어버림을 독자는 알 수 있다.
재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자 은우에게 닥친 건 여태까지의 삶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조금만 더 제대로 살아왔더라면 재윤이 자신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재윤이 조금 더 빨리 제게 마음을 열고 고백하지 않았을까. 그럼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엉망으로 살아온 삶의 방식 때문에 재윤이 제 마음을 믿지 못하는 게 슬펐다. 그날 마주친 재윤의 친구처럼 자신이 그저 밝고 당당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자꾸 그런 후회가 저를 옥죄어 왔다.
<1권 p.372>
하지만, 신은우는 어떨까? 전지적으로 인물을 바라볼 수 있는 독자와 달리, 재윤을 현실에서 마주보아야 하는 은우는 직접 부딪히고 대화하지 않는 이상 강재윤에 대해 알 방도가 없다. 그런 맥락에서 처음으로 상처를 감수하면서라도 곁에 남아있기로 다짐할 만큼 좋아하는 재윤의 모호하기만 한 태도가 은우에게 불안과 회의, 자괴를 가져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말하기' 이전의 은우였다면. 재윤을 만나기 전의 은우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저 자신을 속이고, 억누른 채로 도망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윤와 함께하면 '말하는' 법을 배운 은우는 달랐다. 서툴고 미숙하지만, 미숙한 만큼 날것으로 부딪혀오는 은우의 감정은 재윤을 단단히 가둬둔 껍데기를 부수어버렸다. 상냥하고도 강압적으로 18살 재윤의 세계를 무참히 깨어 버렸다. 도망치지도, 외면하지도 못하도록. 재윤은 선택해야만 했다. 은우를 포기한 채 6년동안 자신을 가둔 알 속에서 안주할 것인지, 아니라면, 알을 깨고 나와 은우의 감정을, 제 감정을 직시할 것인지.
신은우의 일견 위압적인 행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에게 사랑을 쏟아준 어미새에게 아기새가 애정을 돌려주듯이, 재윤에게서 배우고 받은 '애정'을 고스란히 '사랑'의 형태로 돌려준 탓은 아닐까.
요컨대 '듣기'는 은우와 재윤 모두가 성장하는 분기라고 생각 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에게서 애정을 갈구하기를 그만둔 은우가, 타인을 이해하고,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를 배웠다. 상실이 두려워 단단한 껍질을 만들고, 그 안으로 숨어든 재윤이 다시금 세상을 마주보게 되었다. [말하기, 듣기, 쓰기]에서 성장은 쌍방이다. 누구 하나가 상대를 기르고, 가르치는 일방통행의 관계가 아니라.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겉으로 보이는 성장은 은우의 것이지만, 은우가 재윤이에게 영향을 끼치고, 재윤을 바꾸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한다. 비록 의식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해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동등하게, 대등한 애정을 돌려주며 상대를 아끼는 모습이, 짐짓 둘은 사랑을 하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가져다 주어서.
*
2권, 세번째 소제목, '쓰기'는 앞의 내용에 비해 평탄하다고도, 다른 말로는 잔잔하다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큰 사건과 문제 없이, 자잘한 요철과도 같은 일들로 가득하여 부담 없이, 가벼운 연애 소설을 보듯 읽을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1권의 초반에서 떠올렸던 '로맨틱 코미디'는 오히려 2권에 어울리는 장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끌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2권은 먼저, 거시적인 시야로 바라 보려고 한다.
BL뿐만 아니라 로맨스에서도 연하연상 커플은 소설의 시대와 배경을 막론하고 인기가 드높은 설정이다. 이러한 연하연상 커플의 경우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분을 하나 꼽아보자면 역시 연하가 연상에게 말을 놓는. 반말을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연인'으로의 관계 변화와 캐릭터 사이의 친밀감을 보여주기 위해 연하가 사용하는 반말이, 자칫하면 무례로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겨우 말이 반토막 났을 뿐인데, 그동안 연상에게 보여주던 존중과 배려도 전부 반토막이 되어버리고, 마치 자신의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의 변화를 덤으로 수반하는 연하들이 적지 않게 보이는 실정이다.
뭐, 이쪽에는 나쁜 남자가 좋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하지만 적어도 힐링·성장·치유의 이름을 달고서는 그러한 '나쁜 남자'가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무엇보다 원래는 친절하고 다정했던 남자가 말투 하나 바뀌었다고 막무가내로 변해버리는 건 개연성 없이 배신감만 안겨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재윤은,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쓰는 연하 남자친구로선, 가끔 튀어나오는 어린애 취급을 제외하자면 은우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훌륭하게 지켜내었고, 끝까지 둘의 연애를 설레고 따듯한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두 번째로는, 인물의 직업이 그저 배경, 병풍이 아닌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인물의 직업이 명목상으로만, 구실로만 붙어 있는 경우도 곧잘 있는데, 그에 비해 [말하기, 듣기, 쓰기]에서는 은우의 직업이 작가라는 사실이 처음부터 끝까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작가이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작가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 동기들에게 질시를 받았으며, 작가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는 척 하는 재윤을 수십 번씩 떠보고 놀린다. 재윤과 친해지고, 사랑에 빠지게 된 것도 엄연히 말하자면 은우가 작가인 탓이다.(재윤은 은우를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더라도 사랑에 빠졌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차치해 두고.) 2권의 소제목이 '쓰기'라는 점을 헤아려보면 2권에서는 은우가 글을 '쓰는' 것이, 은우가 '작가'인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게 작용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간단하게 줄거리에 대한 내용을 적어 볼까. 아무리 성격이 맞고, 배려심이 흘러넘치는 커플이라고 해도 둘이 서로 다른 사람인 이상 적어도 한 번은 갈등을 빚고, 싸우기 마련이다. 그것은 천재 작가 은우와 열성 팬 재윤의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일어났는데, 갈등이 마무리되는 양상이 상당히 인상 깊게 다가왔다.
“저 때문에 답답했죠?”
“알긴 아는구나.”
“미안해요. 그래도 이번에는 좀 잘 말하고 싶어서 사실 메모장에 글로 정리도 해 봤는데…….”
그 대목에서 은우는 웃음이 나올 뻔해서 목기침을 한 번 했다.
“결국 쓰다 보니까 제가 잘못한 거더라고요. 제 눈에 선배가 너무 좋은 사람인 것만큼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럴 텐데, 그게 싫어서 유치하게 질투했어요. 선배 마음을 의심했던 건 절대 아니고, 선배한테 다가오는 사람들을 의심하고 기분 나빠 했던 건데…… 그게 엉뚱하게 선배한테로 향했던 것 같아요.”
<2권, p.113>
이 대목에서 나는 그만 탄성을 내질러 버렸다. 현실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데, 무려 소설 속 인물이 저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받아들이다니. 가벼이 바라본다면 창작물이니까 더 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물을 그려내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재윤은,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은우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마음 놓고 안심해도 될 것이다.
“내 책 읽었어, 안 읽었어?”
그제야 재윤은 은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된 듯했지만, 오히려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보다 훨씬 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채 눈만 깜빡이는 재윤을 웃으며 바라봤다.
“내 팬이야, 아니야?”
“…….”
“이제 말할 때 되지 않았어? 사인해 줄까?”
천연덕스럽게 하는 질문에 재윤의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어 갔다. 하필이면 그때와 똑같은 흰색 후드 티 차림이라 점점 변하는 피부색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2권, 118p>
또 다른 별미를 들라고 하면, 아무래도 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2권에서 은우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강재윤이 '작가 신은우'를 좋아하는 근거를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빵! 하고 터뜨려버리자 은우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던 재윤은 어쩔 줄 모르고 벌겋게 달아올라버린다. 1권에서, 재윤을 놀려 주겠다 다짐했던 은우의 결심이 실현되는 격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독자들도, 은우가 능글맞게 말을 꺼내는 순간 희열을 느끼지 않았을까. 드디어 비밀이 탄로나는구나! 하는 그런 기분으로.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작품 내내 '완벽'에 가깝던 재윤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리는 점이 아닐까. 견고하게 쌓아 올린 이미지가 깨지면서 갭이 보일 때 가장 귀엽고 즐거운 법이니까.
이 이후의 이야기는, 사실 내가 더이상 꺼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이어진 둘이 바퀴벌레 한쌍마냥 꼬옥 붙어다니며 염장 가득한 연애를 하는 내용이 대부분일 뿐이다. 괜히 내 사견을 달아 둘의 행복을 잣대질하고 싶지도 않은데다, 혹여라도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예비 독자가 내 리뷰를 읽을 지도 모르니까. 적어도, 최소한 둘의 연애 만큼은 직접 읽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되도록이면 본편보다 스포일러로 가득한 리뷰 먼저 보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뿐이지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둘은 사랑을 한다. 아직 여러모로 미숙하고 어색한 은우를 재윤이 앞서 이끌어주고, 은우는 그런 재윤을 옆에서 다잡아준다. 이렇게 다정하고 행복한 결말이 또 있을까.
새로운 방향의 소설을 쓰겠다는 은우의 가장 첫 번째 목표는 아주 멋지게, 훌륭하게 이루어진다. 은우가 결국 '쓰기'에 대해서도 배운 셈이다. 뭐어, 당연히 성공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베스트셀러 연애소설을 집필하던 천재 작가다. 사랑받기 시작한 지금은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다운 소설을 쓸 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해 겨울. 은우와 재윤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적어내린 책은 극찬과 함께 이러한 평이 달린다.
<사랑을 믿지만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과, 사랑을 믿지 않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
라는.
[말하기, 듣기, 쓰기]를 사뭇 인상 깊게 읽은 한 명의 독자로서, 위의 문장은 비단 은우의 소설에만 어울리는 문장이 아니라, 은우와 재윤을 설명해내는데 있어 이보다 더 걸맞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본다.
ps. 사실 2권이랑 외전은 안타깝(?)게도 씬과 사랑으로만 가득해서, 딱히 리뷰를 쓰고 말고 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