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세트] [BL] 향계절신가 - BL the Classics (총3권/완결)
나다 지음 / 더클북컴퍼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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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무협을 볼 때 무협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사람이라면 부디 삼가주시길.




구매해서 개시한(읽기 시작한) 건 10월 1일인데, 일주일이 넘는 오늘, 8일까지 1권을 다 못 읽었다. 어느정도 어설픈 글이라면 산 게 아까워서, 읽기 시작한 게 아까워서라도 빠르게나마 훑어 읽는 편인데 향계절신가는 내게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1. 이럴 거면 무림 병풍 BL소설이라고 홍보를 하던가.
무협지를 보지 않거나/별로 보지 않은, 즉 이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향계절신가는 내게 있어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어릴 적부터 책방과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비뢰도, 묵향, 잠룡전설(제인생무협지입니다), 남궁세가 소공자(인생무협2, BL느낌이 납니다. 조아라에서 읽을 수 있음) 및 기타 수많은 무협지를 읽어버릇 한 사람의 눈에는 향계절신가의 배경이 중원 무림임에도 무림 같지가 않았다. 무슨 소리냐 한다면, 어설프다는 소리다. 뉘앙스도 무협이고, 쓰는 어휘도 무협이지만 사건의 발발이나 해결, 캐릭터의 능력, 사회적 위치 등에 대하여 개연성도, 무엇도 없다. 마치 수능에 나오는 고전소설을 읽는 기분일 뿐이다. 어찌어찌 해서 명약을 얻고, 어찌어찌해서 대단한 사건을 해결한다. 
<무협지라고 한다면 당연히 '무림맹'과 수많은 문파들이 나오니까 여기에도 넣어봐야지. 무협지에 많이 나오는 별호도 좀 붙여보고.> 1권만 읽은 나로선 무림이라는 배경이 소설에 있어 이 정도의 비중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2. 전개가 너무 사건에 치중되어 있다.
작가의 눈에는 모든 등장인물이 다 어여쁘고, 사연있고, 열심히 살아온,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겠지만 등장인물을 소설을 보며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그렇지 않다.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누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향계절신가는 대뜸 처음부터 사건이 터지고, 해결하러 사방팔방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뭐, 물론 그럴 수 있다. 나도 처음에는 열심히 따라갔지. 하지만 적어도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이나 그 후에라도 누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도는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그저 사건, 사건, 사건의 연속이다. 누가 누군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독자는 그 사이 지쳐버릴 뿐이다. 캐릭터에 관한 설명이라고 줄줄 나오는 설명은 많지만, 죄 따로 논다. 그 정보들을 통합해 이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는 의미다. <A를 할 줄 알고, B도 할 줄 알고, C라고 불리운다> 라고만 끝나면 읽는 독자로선 이사람이 그래서 뭔 사람인데.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3. 감정선을 읽을 수 있게 해 달라.
향계절신가에서 주인공은 주인수를 좋아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장르부터 Boy's Love이니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있나. 그러나 나는 주인공(가민)이 주인수(진하상)의 어느 면모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대뜸 좋아한다는 말부터 꺼낸 뒤 구애하기 시작한다. 뭐, 여기까지도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읽어도 읽어도 왜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질투라던가, 설레는 행동이라던가 같은 독자들이 열광할만한 부분은 꽤나 있지만 정작 이 4인방이 어떤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내 눈이 이상한 걸까? 사실 캐릭터 자체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다. 가민이 눈을 부라리면 4인방의 나머지들이 히익 도망가며 질려하는데, 가만 보면 소설에 그 이유가 없다. 가민을 그냥 '질릴만한 사람'이라고 받아들이고 납득하기에 나는, 한 세계에는 인과관계라는 것이 존재하고, 소설을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무슨 말이냐 하냐면 소설이라면 무릇 인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4. 개연성이 부족하다.
1에서도 간략하게 말하고 지나갔는데, 너무 설정이 빈약한 것 같다. 첫 번째 사건인 설련을 예시로 들어보자. 이름난 후지기수인 소진연이 아무런 대응 하나 못한 채 설련을 무영신투에게 빼았긴다. 방심하다가 빼았겼다고는 하나 탈취한 건 탈취한 거니 무영신투도 나름대로 강하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벌떼같이 몰려든 무림인들 사이에서도 줄곧 지켜오고 있으니 나름대로 수준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대뜸 사대신군(진하상 4인방)이 등장하니 무림인들과 무영신투가 헉! 하고 놀란다. 이후 무영신투는 순순히 다툼 하나 없이 사대신군에게 설련을 넘겨주고, 나머지 인물들은 멀뚱히 보기만 한다.
 무영신투는 그럼 누가 설련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훔치고 보았다는 말인가...? 그럼 대체 누가 설련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고...? 그리고 그들이 이름만으로도 놀랄 정도라면 명성과 실력 모두 대단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무영신투는 아무렇지 않게 소진연에게서 설련을 이미 홀라당 빼앗은 참이다. 만일 소진연이 무영신투보다 훨씬 강한 것이라면(깜짝 놀랄 정도니까) 아무리 지쳤다고 하더라도 그리 쉽게 손 한 번 못 써보고 설련을 잃어버렸을 리기 없고, 만일 그러한 강한 소진연보다 무영신투가 강하거나, 비등하다면 놀랄 이유가 없다. 또한, 그것을 제외하고서라도 사대신군이 절대강자가 아닌 이상, 그리고 설련이 설명대로 엄청난 기물이라면 무영신투의 근처로 몰려든 후지기수는 한둘이 아닐 텐데, 손놓고 허무하게 사대신군에게 넘겨주다니...? 아무리 정파는 명분이 중요하다고 한다지만 사람 목숨을 살리고 정치적 입지도 다질 수 있는 귀한 물건이라면 알력 다툼이 생길수밖에 없다. 아니, 알력 다툼일 뿐이랴, 훨씬 더 높은 위치의 고수가 와서 일찍부터 가져갔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파의 고수들은 죄다 어디로 갔나...? 설련이 등장했다는 소식은 듣지도 못할 만큼 죄 늙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헛점투성이에, 쉽게, 잘 해결되기만 한다. 마치 주인공에게 이 세상의 모든 운이 다 따라주는 고전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세트로 질러놓은 향계절신가를 중도 하차해 버렸다. 만일 무협지를 좋아하고 설정에 목매다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부디....부디 재고해주길 바란다.


ps. 2004년도에 쓰인 작품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책 본문 내부뿐 아니라 책 소개에도 명시해두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13년 전이잖아. 두 달 뒤면 14년 전이라고요. 클래식 BL이라고는 했지만 이렇게나 고전일줄을 내가 알았나. 이건 양심의 문제 이상이라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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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트] [BL] 향계절신가 - BL the Classics (총3권/완결)
나다 지음 / 더클북컴퍼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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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을 좋아하는 만큼 무협 또한 좋아해서, 무협BL이라는 말에 홀랑 넘어가 사버렸다. 그러질 말았어야 했는데. 무협지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읽히겠지만 그쪽으로고 본 게 많은 나로선 어설프기만 한 배경과 사건 전개가 딱 쥐약이었다. 특히, 2004년도 작품이란건 책소개에 제발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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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BL] 투썸 투샷(A TWOSOME, TWO-SHOT) 1 [BL] 투썸 투샷(A TWOSOME, TWO-SHOT) 1
이한 / W-Beast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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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는 부인할수 없는 사기꾼에 쓰레기이나, 제이의 헌신적인 신뢰와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고, 변화하려 노력한다.
제이와 함께하기 위해 모든 걸 손에서 놓아 버린 웨스를 누군가는 미련하다 여길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둘만은 그들의 선택에 있어 일말의 후회조차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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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BL] 투썸 투샷(A TWOSOME, TWO-SHOT) 1 [BL] 투썸 투샷(A TWOSOME, TWO-SHOT) 1
이한 / W-Beast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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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성 리뷰입니다, 주의해주세요.





 소설의 제목은 소설의 얼굴과도 같다. 투썸(Twosome)-투샷(Twoshot). 2인조를 뜻하는 투썸과,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은 구도, 두 인물 간의 교류 과정을 시간 순으로 나열했다는 의미의 투샷을 어째서 제목으로 달아 두었을까. 천천히, 그러나 세심하게 웨스과 제이를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이 2인조의 이야기, 시간이 지나며 점차 변화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


들판에서 떠돌다 맞닥뜨린 그 주검에서 제임스는 자신의 미래를 봤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내버려진 채 썩어가는 주검의 악취와 비참한 몰골.

<1권>

나는 이렇게 짐승처럼 질긴 목숨을 잇다가 결국 짐승처럼 비참하게 죽어버리겠지.

울컥 솟아오르는 자기 연민 때문에 제임스는 목이 메었다.

언제쯤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1권>

*

제임스는 물 만난 고기였다. 얼굴에선 늘 이채가 감돌고 말이 많아졌으며 자주 웃었다.

<2권>

양순한 기질을 타고난 제임스에겐 그만의 생존 비법이 있었다. 소박한 언행, 근면 성실함과 겸손함, 사려 깊은 마음씨가 그것이었다.

<2권>


 위의 인용한 문장들이 전부 한 사람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쉬이 납득할 수 있을까. 투썸 투샷을 전부 읽은 독자가 아니라면 아마 힘들지 않나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제이 제임스. 우리의 제이는 고아로 자라나, 목장에서 카우보이 일을 하다가 새 직업을 위해 시카고로 왔지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만다.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채 인간성을 말살하는 빈민 구제소를 거치고,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제이의 자존감, 자신감, 희망, 용기와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전부 날아가 버렸다.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제이는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또다시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빼앗기고, 설상가상으로  불량배들에게 폭행까지 당한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에게 두 번이나 사기를 친 희대의 사기꾼,  하이미 웨스와 세 번째의, 우연찮은 재회를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작품 초반에서의 제이, 제임스는 끔찍하게 답답하고 부정적이며, 자기혐오에 머리 끝까지 절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 포털 사이트와 전자책 플랫폼마다 주인수가 답답해서 못 읽겠다는 리뷰가 괜히 즐비한 게 아니다. 웨스-자신을 등쳐먹은 사기꾼이 자신의 장례를 치뤄 줄 테니(1년 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은 차치하고서라도) 몸과 마음을 바쳐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마저 하는데, 오죽했으랴.

 

“얼굴의 이 상처도 며칠만 더 지나면 말끔히 사라져. 중요한 건 네가 너 자신을 보는 관점이야. 남의 집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부랑자로 보는가, 아니면 성공을 꿈꾸며 바람의 도시로 찾아든 패기만만하고 젊은 카우보이로 보는가, 관점에 달렸지. 네 허약한 껍질이 아니라 그 안을 꿰뚫어 봐야 해. 다시 거울을 봐봐. 너의 내면을 보라고.”

<1권>

“다시 따라 해봐. 나는 강하고 당당하다.”

“…… 나는 강하고…….”

“그게 뭐야. 말투에 전혀 맥아리가 없잖아. 삼시 세 끼 열심히 골고루 먹여놨거늘, 병든 수탉처럼 골골댈래? 소 이백여 마리를 혼자서 몰아댄 카우보이였다며? 다시 힘차게 따라 해봐. 신념과 갈망을 품고서. 나는 강하고 당당하다.”

“나는 강하고 당당하다.”

“그렇지. 나는 똑똑하고 대담하며 무엇이든 해낸다.”

<1권>

  모든 사건의 정황을 아는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선 바보같은 제이의 행동에 울화통이 터질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정작 제이에게 있어 웨스와의 동업은 다시 일어설 기회가 되었다. 사기꾼의 동업자, 즉 같은 사기꾼이 되려면 말끔한 외모와 능수능란한 언변또한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엇보다도 당당함이 필요했다. 웨스는 쓸만한 일꾼 하나를 만들겠답시고 의도치 않게 제이가 자신감을 가지도록, 변하도록 도와준 셈이다. 병주고 약준다의 모범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장면 덕분에 추락하다 못해 지구 반대편까지 뚫고 들어가던 내 안의 웨스의 첫인상이 '괜찮네?' 정도로 바뀌었다. 노예계약 수준으로 제이를 부려먹을 속셈인 갱생 불가능의 사기꾼이지만, 진창을 구르던 사람을 끌어올려, 절망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웨스의 극진한 관리에 보답이라도 하듯 밝고 상냥한 면모를 되찾기 시작한 제이는 웨스에게 맹목적인 신뢰를 주며 유쾌하고도 아슬아슬한 2인조 사기꾼의 나날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사랑에 빠져버린 건,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물론 나는 배알없이 저런 똥차를 좋아한다고 짜증을 냈지만)

 



 그러나 모든 소설에는 시련이 있기 마련이고, 투썸 투샷 또한 소설이기에, 결국 제이와 웨스는 크나큰 시련을 만난다. 유약한 것 같으면서도 다정하고 강단 있는 제이와 정이 들고, 마음을 나누기 시작하며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둔 채 '팔자 좋게' 제이에게 선물할 꽃다발과 샴페인을 사들고 오던 웨스가 골목에서 끔찍한 폭행을 당해버린 것이다. 웨스에게 당한 뒤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던 부패경찰 오스왈드의 소행이었다.


연애라도 하는 양 들떠서 꽃을 사 들고 샴페인을 사 들고 꼴좋았지.

놈들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놈이 자신을 알아본 것도 몰랐다.

일생일대의 실수였고 대가는 뼈아팠다.

누굴 탓하겠는가.

주제를 잊고 방심한 놈이 병신이었다. 

<2권>

 이 사건 이후 웨스는 자괴감 속에 파묻혀, 화풀이를 하듯 제이에게 가차 없는 폭언을 던지고(이따위 구제불능을 좋아하는 제이의 안목에 욕을 했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제이에게 대놓고 좋아하지 말라는 엄포를 두면서도(여기서 또다시 욕을 했다) 무의식적으로는 제이가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둘의 관계는 전적으로, 자기합리화를 위해 웨스가 내뱉은 논리적인 궤변을 받아들여 주고, 한결같이 곁을 지켜 준 제이의 덕이 컸다. 




 '그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 나는 악당의 악행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이 문구를 정말 싫어한다. 그리고 웨스는,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의 '좋은 녀석' 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엄연히 말하자면 더러운 성격과 사기 행각에 국한해 들어맞는다고 해야겠지만 웨스의 정체성은 사기와 더러운 성격이었기 때문에 세세하게 파고들지 않아도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을 것이다. 작품 전반적으로 보이는, 툴툴거리면서도 주변인을 생각하는 다정함과, 제이의 신뢰를 받으며 점점 변화하는 모습만 아니었다면 이미 애저녁에 투썸 투샷 읽기를 포기해버렸을 지도 모른다.


 실컷 줄거리를 설명하다가 왜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느냐 묻는다면, 작품 전체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도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건이, 제이와 웨스의 관계가 변하는 분기점이 바로 웨스의 이 '다정함'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멍청하다고 매번 책망하고 괴롭혔던, 그럼에도 한결같이 자신만을 의지하던 덜떨어진 고향 친구 '베니'가 자신의 원한관계에 휘말려 살해당하자 웨스는 결단을 내린다. 내려야만 했다.


“놈은 이 세상에서 저만 믿었다구요.”

<2권>

 자신이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조차 전에,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다. 웨스는 더이상 제 감정을 외면하고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이미 떠나간 소중한 친구에 대한 애정도, 어느새 마음 속에서 거대하게 자라나 버린 사랑도. 

 가차없이 행동하는 것만 같아도 마음 한 구석에는 다정함이란 감정이 존재하던 웨스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중요하게 여기던 자존심을, 사기꾼으로서 큰 건을 잡아 부자가 되리라는 목표를 포기한다. 베니의 복수를 위해 그토록 거리를 두던 고향에 내려가고, 제이와 함께하기 위해 여태껏 자신이 일구고 행하던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 버린다.

 이로써 본편은 끝이 나고, 비로소 제이와 웨스의 사랑이 시작된다. 누군가는 미련하고 바보같은 짓이라 여길 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적어도 이 둘만은 그들의 선택에 있어 일말의 후회조차 없지 않을까. 


소박하고 부드러운 마음씨, 늘 남을 배려하고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같이 나누려는 제임스의 마음이 맞잡은 손을 타고 흘러들었다.

웨스는 되돌려 주고 싶었다. 자신이 받았던 과분한 신뢰와 헌신을.

그로 인해서 깨닫게 된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인생의 가치와 일상의 소박한 기쁨을 자신이 얻는 만큼 되돌려 주고 싶었다.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양순한 카우보이에게.

<2권>

 재력과 권력만이 강인함의 척도는 아니다. 사람의 강함이란 뛰어난 신체와 정신력을 이용해 상처를 입지 않는 것만으로 결정되지도 않는다. 어찌 본다면 유약하고 소심한 제이, 제임스가, 사실은 무척이나 강인한 사람이라는 것은, 웨스가 가장 잘 알 것이었다.


*


 (주로 웨스 때문이었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조금 있어, 책을 중도 포기할 위기가 몇 번 있었다. 그 중 하나로써, 알라딘과 내가 한창 주목하고 있는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보자면, 투썸 투샷의 여캐 활용 방식은 최악의 최악을 달린다. 뭐, 오로지 이한 작가님의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192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부터 짐작을 했어야 했는데. 내 불찰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시대 반영(비록 반갑진 않더라도), 잘 짜여진 개연성과 사건 전개, 인물간의 관계와 감정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입체적인 인물들이 투썸 투샷을 읽게 한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웨스는 분명히, 부인할 수 없는 악당이자 쓰레기지만 제이를 만났고, 제이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변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경험을 통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라고 충고를 하지만, 적어도 소설에서 만큼은 사람이 발전하고, 변할 수 있다고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제이와 웨스는, 서로를 누구보다도 아끼며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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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트] [BL] 말하기, 듣기, 쓰기 (총2권/완결)
조제오 지음 / 시크노블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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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성 리뷰입니다, 주의해주세요. 

※페이지는 이북의 원본 설정을 기준으로 명시했습니다. 리더기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유념해주세요.
※리뷰의 제목은 본편 마지막 장의 문장을 수정·인용하였음을 알립니다.




 까만 배경에 하얀 글씨로 적힌 책의 제목, [말하기, 듣기, 쓰기].

현재 20대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익숙한 제목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지만, 당장에 나만 해도 초등학생 때 [말하기, 듣기, 쓰기] 라고 불리는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해보자면. 어쩌면 이 소설의 첫인상은 괴리감에서부터 시작할지도 모른다. 대학교 3학년의, 이미 군대까지 다녀온 두 남자의 연애사에 안 어울리게 초등학교 교과서 제목을 갖다 붙일 건 대체 뭐람? 그러나 일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의문을 한 구석으로 몰아낸 뒤 글을 읽어내리는 그 순간부터, 제목과 장르 사이의 괴리감은 천천히,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린다. 


 정갈하게 이어지는 활자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조제오 작가의 [말하기, 듣기, 쓰기]를 읽어 보자. 천재 작가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선 어린애와 다를 바 없는 신은우와, 그런 신은우의 열성 팬이자 상실이 두려워 자신만의 세계로 숨어들어버린 강재윤이,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며,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말하기', '듣기', '쓰기'에 대해 배워가는 모습에. 어느 순간, 목 언저리에 바윗덩이라도 끼인 듯 먹먹해지며 눈가가 시큰거리는 경험을, 당신 또한 겪게 될 것이다.


*


은우는 어떻게 해야 그가 저에게 아는 척하고, 친한 척하고 싶어 안달할지를 고민하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어떻게든 재윤의 입에서 팬이에요, 좋아해요, 라는 말을 받아내고 싶어졌다. 저 무심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보니까 더 그랬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그날의 일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티 내지 않기로 했다.


아, 근데 왜 자꾸 아는 척하고 싶지?

<1권, p.21>


 1권의 초입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말하기, 듣기, 쓰기]가 <유명한 작가와 작가를 따라다니는 열성 팬>의 사랑 이야기라는, 흔한 클리셰의 소설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도입부만을 놓고 본다면 아무래도 작가와 팬 사이의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가 제일 먼저 떠오르니까. 사실 이 소설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와 동시에 작품 소개와 100자평, 마이 리뷰에서 간간히 보이는 '힐링', 치유' 라는 단어가 소설과 과연 어울리는가? 싶은 의문을 갖는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감상은 1장 내내 이어진다. 학교 생활의 많은 부분을 함께하면서 친해진 자신의 팬―강재윤은 한결같이 신은우에 대해 모르는 척, 처음 만난 선배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은우는 그런 재윤에 대해 의아함을 가지면서도 멋있는 작가처럼 보이고 싶어하고, 재윤이 자신의 팬임을 확인받고 싶어 안달복달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재윤에게 괜히 한 번이라도 더 시선이 가고, 마음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고, 재윤의 작은 몸짓과 가벼운 말 한마디에도 온 신경이 쏠려 밤잠을 설치는 은우는 우리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사랑에 빠진 주인공'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누가 보더라도 귀엽고, 설레며, 부담스럽지 않은 로맨스라 생각하리라.


 그러나 재윤과 오랜 시간을 공유하게 되면서 점차 드러나는 은우의 형편없는 인간관계, 부정적인 평판은 글의 분위기를 사뭇 바꾸어버린다. 재윤을 만나 마냥 즐겁고 행복할 것만 같던 은우는 어디에도 없다. 자격지심과 피해의식, 악의로 가득한 동기들과, 그들이 키운 난잡한 소문과 오해는 은우가 가장 외면하고 싶어하던 상처를 무참히 헤집어놓는다. 


 자, 여기서 잠시 멈춰, 어떻게 이러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 우리의 주인수 신은우를 간략하게 알아보자.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살아온 신은우는 극심한 애정결핍에 시달린다. 타인에게 애정을 갈구하며, 사랑 받기 위해 부던히 애를 쓰면서도 자신이 상처 받을까 두려워 피상적인 관계에만 안주한다. 진실하지 않고, 애정을 주지 않는(못하는) 신은우의 행동에 사람들은 점차 나가떨어지고, 이러한 악순환의 반복에서 은우는 어쩔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와 함께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결국 우유부단한 은우는, 자신에게 악의적인 현실에서 도피만을 선택하고, 열등감으로 가득 찬 동기들은 그런 은우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고 오해하며 허구의 '신은우'를 만들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도와 달라고 말해 줘요."

"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은우는 심각한 분위기도 잠시 잊고 평소처럼 바보같이 되물었다.

"그 말 듣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재윤의 말은 아리송했다. 당황스러움이 은우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자 내내 무표정하던 재윤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오지랖 부리면서 도울 수 있게 해 줘요. 지금은 뭘 해도 참견하는 것밖에 안 되잖아. 그러니까 꼭 말해 줘요. 지금 말하기 힘들면 나중에라도."

<1권, p.130>

 만일 현실에서의 이야기라면 답이 없는 상황에 한숨부터 터져나오겠지만, 명심하자. 우리가 읽은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다. 그것도 '성장' 이라는 꼬리표가 달랑달랑 매달린. 힐링·치유물 BL소설에서 공의 활약을 어찌 빼놓을 수 있을까. 은우의 시련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재윤은 슈퍼달링과 같은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두려워하는 은우에게 용기를 주고, 물밑으로는 은우가 해명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준다. 극도의 애정결핍에 사로잡혀 누구에게도 쓴소리 한번 내뱉지 못하던 신은우는 강재윤과 함께하고서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서 애정을 갈구하기를 그만둔다. 혼자 주저앉지 않도록 자신을 받쳐주는 재윤의 곁에서 오해를 직접 해명하고, 악의를 대등하게 받아치며 은우는 비로소 '말하기'를 배운다.


 1권의 전반부는 은우의 성장을 다룬다. 미시적으로는 은우가 재윤과 친해지고 호감을 느끼는 과정, 재윤이 은우의 정체에 대해 모른 척한다는 복선이 조밀하게 깔려 있으나, 소제목 '말하기'를 꿰뚫는 핵심 주제는 분명히 은우의 성장, '말하는' 방법을 배운 신은우이다. 자칫하면 동정에 빠져 길게 늘어지며 지루할 수 있었던 부분인데, 작가가 잘 정돈해내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시점이 1인칭인 탓인지, 아니면 주인공에게 과도하게 이입한 건지. 은우가 절대적인 피해자, 선량할 뿐인 존재로 그려진 면은 약간 신경이 쓰였으나, 우리는 '성장소설'이 아니라 주인공이 성장하는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있으니 조금은 너그럽게 바라봐도 괜찮지 않을까.


*


 자, 그럼 이제 1권의 후반부, 소제목 '듣기'를 파고들어 보자. '말하기'에서 은우가 '말하는' 법을 배운 사실을 고려하면 우리는 '듣기'에서 은우가 '듣는' 법에 대해 배우지 않을까, 간단히 예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한 자 한 자 글을 읽어갈수록 우리는, 은우뿐 아니라 다른 한 사람에게도 주목하게 된다. 1권의 후반부인 '듣기'는 인간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은우의 눈에도 확연히 드러날 만큼 혼란스러워 하는 재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확산되기 때문일테다.


"오늘 아버지 기일이었어요."

영영 제 얘기를 할 것 같지 않던 재윤이 입을 뗐다. 여전히 안겨 있는 상태로 말하는 거라 은우는 제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재윤의 목소리를 차분히 들었다.

"돌아가신 지 꽤 오래됐는데."

"……."

"괜찮다고는 말 못하겠어요."

<1권, p.226>

 독자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핵심 사건은 은우가 재윤이의 가족을 만나는 부분이다. 재윤의 다정함은 화목한 집안에서 자란 특권이라고,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처럼 피해의식에 젖어 부러워하기만 하던 은우가 재윤 또한 쉽게만 살아온 인생은 아니라고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던 진심을 끌어내 보여주고, 재윤 또한 그런 은우에게 마침내 자신을 내보인 순간이기도 했다. 다정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다가가기 힘들었던 재윤이가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렸다. 은우는 점차 타인에 대해 듣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은우는 그런 재윤이 좋았다.


 오히려 재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먼저 입을 맞춰 온 건 재윤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상처받은 것처럼 나가는 모습에 은우는 얼떨떨했다.

<1권, p.301>

 하지만 녹아내렸다고 생각한 재윤은 은우에게 있어,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뒤죽박죽인 태도만을 보여준다. 은우가 타인과 있는 모습에 질투하면서도 은우에게 거리를 두고 밀어낸다. 종내 은우를 피해 다니기까지 하는 재윤의 반응은, 점차 재윤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보이기 시작한 은우와는 정반대의 행보였다. 

"그 사람이 그냥 연애를 하고 싶어서 저랑 만나는 걸까 봐, 제가 잘해 주니까 한번 만나 볼까 하는 심정일까 봐 그래요."

<1권, p.330>

 재윤의 말마따나 애정에 약한 은우니까, 은우의 감정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 탓이라 설명하기에는 분명히 과한 면모가 있었다. 


 물론 독자는 1권의 끄트머리에 덧붙는 강재윤 시점을 읽고서 이 녀석의 태도가 오르락 내리락 널을 뛰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다. 무난한 배경, 무난한 집안에서의 무난한 삶. 마음껏 여유롭고 배려심 많을 수 있었던 무사태평한 인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큰 '상실', 즉, 아버지의 죽음은 단지 열여덟일 뿐인 어린 재윤의 상당 부분을 바꾸어버렸다. 소중한 존재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곁에 있던 모든 이들을 밀어냈다. 아무도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도록, '상실'을 줄 수 없도록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게 되었음을,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나오지 않게 되어버림을 독자는 알 수 있다.


재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자 은우에게 닥친 건 여태까지의 삶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조금만 더 제대로 살아왔더라면 재윤이 자신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재윤이 조금 더 빨리 제게 마음을 열고 고백하지 않았을까. 그럼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엉망으로 살아온 삶의 방식 때문에 재윤이 제 마음을 믿지 못하는 게 슬펐다. 그날 마주친 재윤의 친구처럼 자신이 그저 밝고 당당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자꾸 그런 후회가 저를 옥죄어 왔다. 

<1권 p.372>

 하지만, 신은우는 어떨까? 전지적으로 인물을 바라볼 수 있는 독자와 달리, 재윤을 현실에서 마주보아야 하는 은우는 직접 부딪히고 대화하지 않는 이상 강재윤에 대해 알 방도가 없다. 그런 맥락에서 처음으로 상처를 감수하면서라도 곁에 남아있기로 다짐할 만큼 좋아하는 재윤의 모호하기만 한 태도가 은우에게 불안과 회의, 자괴를 가져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말하기' 이전의 은우였다면. 재윤을 만나기 전의 은우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저 자신을 속이고, 억누른 채로 도망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윤와 함께하면 '말하는' 법을 배운 은우는 달랐다. 서툴고 미숙하지만, 미숙한 만큼 날것으로 부딪혀오는 은우의 감정은 재윤을 단단히 가둬둔 껍데기를 부수어버렸다. 상냥하고도 강압적으로 18살 재윤의 세계를 무참히 깨어 버렸다. 도망치지도, 외면하지도 못하도록. 재윤은 선택해야만 했다. 은우를 포기한 채 6년동안 자신을 가둔 알 속에서 안주할 것인지, 아니라면, 알을 깨고 나와 은우의 감정을, 제 감정을 직시할 것인지.

 신은우의 일견 위압적인 행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에게 사랑을 쏟아준 어미새에게 아기새가 애정을 돌려주듯이, 재윤에게서 배우고 받은 '애정'을 고스란히 '사랑'의 형태로 돌려준 탓은 아닐까.



요컨대 '듣기'는 은우와 재윤 모두가 성장하는 분기라고 생각 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에게서 애정을 갈구하기를 그만둔 은우가, 타인을 이해하고,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를 배웠다. 상실이 두려워 단단한 껍질을 만들고, 그 안으로 숨어든 재윤이 다시금 세상을 마주보게 되었다. [말하기, 듣기, 쓰기]에서 성장은 쌍방이다. 누구 하나가 상대를 기르고, 가르치는 일방통행의 관계가 아니라.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겉으로 보이는 성장은 은우의 것이지만, 은우가 재윤이에게 영향을 끼치고, 재윤을 바꾸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한다. 비록 의식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해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동등하게, 대등한 애정을 돌려주며 상대를 아끼는 모습이, 짐짓 둘은 사랑을 하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가져다 주어서.


*


2권, 세번째 소제목, '쓰기'는 앞의 내용에 비해 평탄하다고도, 다른 말로는 잔잔하다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큰 사건과 문제 없이, 자잘한 요철과도 같은 일들로 가득하여 부담 없이, 가벼운 연애 소설을 보듯 읽을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1권의 초반에서 떠올렸던 '로맨틱 코미디'는 오히려 2권에 어울리는 장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끌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2권은 먼저, 거시적인 시야로 바라 보려고 한다.


 BL뿐만 아니라 로맨스에서도 연하연상 커플은 소설의 시대와 배경을 막론하고 인기가 드높은 설정이다. 이러한 연하연상 커플의 경우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분을 하나 꼽아보자면 역시 연하가 연상에게 말을 놓는. 반말을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연인'으로의 관계 변화와 캐릭터 사이의 친밀감을 보여주기 위해 연하가 사용하는 반말이, 자칫하면 무례로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겨우 말이 반토막 났을 뿐인데, 그동안 연상에게 보여주던 존중과 배려도 전부 반토막이 되어버리고, 마치 자신의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의 변화를 덤으로 수반하는 연하들이 적지 않게 보이는 실정이다.


 뭐, 이쪽에는 나쁜 남자가 좋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하지만 적어도 힐링·성장·치유의 이름을 달고서는 그러한 '나쁜 남자'가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무엇보다 원래는 친절하고 다정했던 남자가 말투 하나 바뀌었다고 막무가내로 변해버리는 건 개연성 없이 배신감만 안겨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재윤은,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쓰는 연하 남자친구로선, 가끔 튀어나오는 어린애 취급을 제외하자면 은우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훌륭하게 지켜내었고, 끝까지 둘의 연애를 설레고 따듯한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두 번째로는, 인물의 직업이 그저 배경, 병풍이 아닌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인물의 직업이 명목상으로만, 구실로만 붙어 있는 경우도 곧잘 있는데, 그에 비해 [말하기, 듣기, 쓰기]에서는 은우의 직업이 작가라는 사실이 처음부터 끝까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작가이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작가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 동기들에게 질시를 받았으며, 작가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는 척 하는 재윤을 수십 번씩 떠보고 놀린다. 재윤과 친해지고, 사랑에 빠지게 된 것도 엄연히 말하자면 은우가 작가인 탓이다.(재윤은 은우를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더라도 사랑에 빠졌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차치해 두고.) 2권의 소제목이 '쓰기'라는 점을 헤아려보면 2권에서는 은우가 글을 '쓰는' 것이, 은우가 '작가'인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게 작용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간단하게 줄거리에 대한 내용을 적어 볼까. 아무리 성격이 맞고, 배려심이 흘러넘치는 커플이라고 해도 둘이 서로 다른 사람인 이상 적어도 한 번은 갈등을 빚고, 싸우기 마련이다. 그것은 천재 작가 은우와 열성 팬 재윤의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일어났는데, 갈등이 마무리되는 양상이 상당히 인상 깊게 다가왔다.

“저 때문에 답답했죠?”

 “알긴 아는구나.”

 “미안해요. 그래도 이번에는 좀 잘 말하고 싶어서 사실 메모장에 글로 정리도 해 봤는데…….”

그 대목에서 은우는 웃음이 나올 뻔해서 목기침을 한 번 했다.

“결국 쓰다 보니까 제가 잘못한 거더라고요. 제 눈에 선배가 너무 좋은 사람인 것만큼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럴 텐데, 그게 싫어서 유치하게 질투했어요. 선배 마음을 의심했던 건 절대 아니고, 선배한테 다가오는 사람들을 의심하고 기분 나빠 했던 건데…… 그게 엉뚱하게 선배한테로 향했던 것 같아요.”

<2권, p.113>

 이 대목에서 나는 그만 탄성을 내질러 버렸다. 현실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데, 무려 소설 속 인물이 저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받아들이다니. 가벼이 바라본다면 창작물이니까 더 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물을 그려내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재윤은,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은우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마음 놓고 안심해도 될 것이다.


“내 책 읽었어, 안 읽었어?”

 그제야 재윤은 은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된 듯했지만, 오히려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보다 훨씬 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채 눈만 깜빡이는 재윤을 웃으며 바라봤다.

 “내 팬이야, 아니야?”

 “…….”

 “이제 말할 때 되지 않았어? 사인해 줄까?”

  천연덕스럽게 하는 질문에 재윤의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어 갔다. 하필이면 그때와 똑같은 흰색 후드 티 차림이라 점점 변하는 피부색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2권, 118p>

 또 다른 별미를 들라고 하면, 아무래도 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2권에서 은우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강재윤이 '작가 신은우'를 좋아하는 근거를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빵! 하고 터뜨려버리자 은우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던 재윤은 어쩔 줄 모르고 벌겋게 달아올라버린다. 1권에서, 재윤을 놀려 주겠다 다짐했던 은우의 결심이 실현되는 격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독자들도, 은우가 능글맞게 말을 꺼내는 순간 희열을 느끼지 않았을까. 드디어 비밀이 탄로나는구나! 하는 그런 기분으로.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작품 내내 '완벽'에 가깝던 재윤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리는 점이 아닐까. 견고하게 쌓아 올린 이미지가 깨지면서 갭이 보일 때 가장 귀엽고 즐거운 법이니까. 



  이 이후의 이야기는, 사실 내가 더이상 꺼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이어진 둘이 바퀴벌레 한쌍마냥 꼬옥 붙어다니며 염장 가득한 연애를 하는 내용이 대부분일 뿐이다. 괜히 내 사견을 달아 둘의 행복을 잣대질하고 싶지도 않은데다, 혹여라도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예비 독자가 내 리뷰를 읽을 지도 모르니까. 적어도, 최소한 둘의 연애 만큼은 직접 읽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되도록이면 본편보다 스포일러로 가득한 리뷰 먼저 보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뿐이지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둘은 사랑을 한다. 아직 여러모로 미숙하고 어색한 은우를 재윤이 앞서 이끌어주고, 은우는 그런 재윤을 옆에서 다잡아준다. 이렇게 다정하고 행복한 결말이 또 있을까.

 새로운 방향의 소설을 쓰겠다는 은우의 가장 첫 번째 목표는 아주 멋지게, 훌륭하게 이루어진다. 은우가 결국 '쓰기'에 대해서도 배운 셈이다. 뭐어, 당연히 성공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베스트셀러 연애소설을 집필하던 천재 작가다. 사랑받기 시작한 지금은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다운 소설을 쓸 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해 겨울. 은우와 재윤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적어내린 책은 극찬과 함께 이러한 평이 달린다.

<사랑을 믿지만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과, 사랑을 믿지 않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 

라는.


[말하기, 듣기, 쓰기]를 사뭇 인상 깊게 읽은 한 명의 독자로서, 위의 문장은 비단 은우의 소설에만 어울리는 문장이 아니라, 은우와 재윤을 설명해내는데 있어 이보다 더 걸맞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본다.





ps. 사실 2권이랑 외전은 안타깝(?)게도 씬과 사랑으로만 가득해서, 딱히 리뷰를 쓰고 말고 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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