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무협을 볼 때 무협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사람이라면 부디 삼가주시길.
구매해서 개시한(읽기 시작한) 건 10월 1일인데, 일주일이 넘는 오늘, 8일까지 1권을 다 못 읽었다. 어느정도 어설픈 글이라면 산 게 아까워서, 읽기 시작한 게 아까워서라도 빠르게나마 훑어 읽는 편인데 향계절신가는 내게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1. 이럴 거면 무림 병풍 BL소설이라고 홍보를 하던가.
무협지를 보지 않거나/별로 보지 않은, 즉 이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향계절신가는 내게 있어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어릴 적부터 책방과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비뢰도, 묵향, 잠룡전설(제인생무협지입니다), 남궁세가 소공자(인생무협2, BL느낌이 납니다. 조아라에서 읽을 수 있음) 및 기타 수많은 무협지를 읽어버릇 한 사람의 눈에는 향계절신가의 배경이 중원 무림임에도 무림 같지가 않았다. 무슨 소리냐 한다면, 어설프다는 소리다. 뉘앙스도 무협이고, 쓰는 어휘도 무협이지만 사건의 발발이나 해결, 캐릭터의 능력, 사회적 위치 등에 대하여 개연성도, 무엇도 없다. 마치 수능에 나오는 고전소설을 읽는 기분일 뿐이다. 어찌어찌 해서 명약을 얻고, 어찌어찌해서 대단한 사건을 해결한다.
<무협지라고 한다면 당연히 '무림맹'과 수많은 문파들이 나오니까 여기에도 넣어봐야지. 무협지에 많이 나오는 별호도 좀 붙여보고.> 1권만 읽은 나로선 무림이라는 배경이 소설에 있어 이 정도의 비중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2. 전개가 너무 사건에 치중되어 있다.
작가의 눈에는 모든 등장인물이 다 어여쁘고, 사연있고, 열심히 살아온,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겠지만 등장인물을 소설을 보며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그렇지 않다.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누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향계절신가는 대뜸 처음부터 사건이 터지고, 해결하러 사방팔방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뭐, 물론 그럴 수 있다. 나도 처음에는 열심히 따라갔지. 하지만 적어도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이나 그 후에라도 누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도는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그저 사건, 사건, 사건의 연속이다. 누가 누군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독자는 그 사이 지쳐버릴 뿐이다. 캐릭터에 관한 설명이라고 줄줄 나오는 설명은 많지만, 죄 따로 논다. 그 정보들을 통합해 이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는 의미다. <A를 할 줄 알고, B도 할 줄 알고, C라고 불리운다> 라고만 끝나면 읽는 독자로선 이사람이 그래서 뭔 사람인데.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3. 감정선을 읽을 수 있게 해 달라.
향계절신가에서 주인공은 주인수를 좋아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장르부터 Boy's Love이니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있나. 그러나 나는 주인공(가민)이 주인수(진하상)의 어느 면모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대뜸 좋아한다는 말부터 꺼낸 뒤 구애하기 시작한다. 뭐, 여기까지도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읽어도 읽어도 왜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질투라던가, 설레는 행동이라던가 같은 독자들이 열광할만한 부분은 꽤나 있지만 정작 이 4인방이 어떤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내 눈이 이상한 걸까? 사실 캐릭터 자체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다. 가민이 눈을 부라리면 4인방의 나머지들이 히익 도망가며 질려하는데, 가만 보면 소설에 그 이유가 없다. 가민을 그냥 '질릴만한 사람'이라고 받아들이고 납득하기에 나는, 한 세계에는 인과관계라는 것이 존재하고, 소설을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무슨 말이냐 하냐면 소설이라면 무릇 인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4. 개연성이 부족하다.
1에서도 간략하게 말하고 지나갔는데, 너무 설정이 빈약한 것 같다. 첫 번째 사건인 설련을 예시로 들어보자. 이름난 후지기수인 소진연이 아무런 대응 하나 못한 채 설련을 무영신투에게 빼았긴다. 방심하다가 빼았겼다고는 하나 탈취한 건 탈취한 거니 무영신투도 나름대로 강하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벌떼같이 몰려든 무림인들 사이에서도 줄곧 지켜오고 있으니 나름대로 수준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대뜸 사대신군(진하상 4인방)이 등장하니 무림인들과 무영신투가 헉! 하고 놀란다. 이후 무영신투는 순순히 다툼 하나 없이 사대신군에게 설련을 넘겨주고, 나머지 인물들은 멀뚱히 보기만 한다.
무영신투는 그럼 누가 설련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훔치고 보았다는 말인가...? 그럼 대체 누가 설련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고...? 그리고 그들이 이름만으로도 놀랄 정도라면 명성과 실력 모두 대단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무영신투는 아무렇지 않게 소진연에게서 설련을 이미 홀라당 빼앗은 참이다. 만일 소진연이 무영신투보다 훨씬 강한 것이라면(깜짝 놀랄 정도니까) 아무리 지쳤다고 하더라도 그리 쉽게 손 한 번 못 써보고 설련을 잃어버렸을 리기 없고, 만일 그러한 강한 소진연보다 무영신투가 강하거나, 비등하다면 놀랄 이유가 없다. 또한, 그것을 제외하고서라도 사대신군이 절대강자가 아닌 이상, 그리고 설련이 설명대로 엄청난 기물이라면 무영신투의 근처로 몰려든 후지기수는 한둘이 아닐 텐데, 손놓고 허무하게 사대신군에게 넘겨주다니...? 아무리 정파는 명분이 중요하다고 한다지만 사람 목숨을 살리고 정치적 입지도 다질 수 있는 귀한 물건이라면 알력 다툼이 생길수밖에 없다. 아니, 알력 다툼일 뿐이랴, 훨씬 더 높은 위치의 고수가 와서 일찍부터 가져갔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파의 고수들은 죄다 어디로 갔나...? 설련이 등장했다는 소식은 듣지도 못할 만큼 죄 늙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헛점투성이에, 쉽게, 잘 해결되기만 한다. 마치 주인공에게 이 세상의 모든 운이 다 따라주는 고전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세트로 질러놓은 향계절신가를 중도 하차해 버렸다. 만일 무협지를 좋아하고 설정에 목매다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부디....부디 재고해주길 바란다.
ps. 2004년도에 쓰인 작품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책 본문 내부뿐 아니라 책 소개에도 명시해두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13년 전이잖아. 두 달 뒤면 14년 전이라고요. 클래식 BL이라고는 했지만 이렇게나 고전일줄을 내가 알았나. 이건 양심의 문제 이상이라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