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성 리뷰입니다, 주의해주세요.
소설의 제목은 소설의 얼굴과도 같다. 투썸(Twosome)-투샷(Twoshot). 2인조를 뜻하는 투썸과,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은 구도, 두 인물 간의 교류 과정을 시간 순으로 나열했다는 의미의 투샷을 어째서 제목으로 달아 두었을까. 천천히, 그러나 세심하게 웨스과 제이를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이 2인조의 이야기, 시간이 지나며 점차 변화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
들판에서 떠돌다 맞닥뜨린 그 주검에서 제임스는 자신의 미래를 봤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내버려진 채 썩어가는 주검의 악취와 비참한 몰골.
<1권>
나는 이렇게 짐승처럼 질긴 목숨을 잇다가 결국 짐승처럼 비참하게 죽어버리겠지.
울컥 솟아오르는 자기 연민 때문에 제임스는 목이 메었다.
언제쯤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1권>
*
제임스는 물 만난 고기였다. 얼굴에선 늘 이채가 감돌고 말이 많아졌으며 자주 웃었다.
<2권>
양순한 기질을 타고난 제임스에겐 그만의 생존 비법이 있었다. 소박한 언행, 근면 성실함과 겸손함, 사려 깊은 마음씨가 그것이었다.
<2권>
위의 인용한 문장들이 전부 한 사람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쉬이 납득할 수 있을까. 투썸 투샷을 전부 읽은 독자가 아니라면 아마 힘들지 않나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제이 제임스. 우리의 제이는 고아로 자라나, 목장에서 카우보이 일을 하다가 새 직업을 위해 시카고로 왔지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만다.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채 인간성을 말살하는 빈민 구제소를 거치고,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제이의 자존감, 자신감, 희망, 용기와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전부 날아가 버렸다.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제이는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또다시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빼앗기고, 설상가상으로 불량배들에게 폭행까지 당한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에게 두 번이나 사기를 친 희대의 사기꾼, 하이미 웨스와 세 번째의, 우연찮은 재회를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작품 초반에서의 제이, 제임스는 끔찍하게 답답하고 부정적이며, 자기혐오에 머리 끝까지 절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 포털 사이트와 전자책 플랫폼마다 주인수가 답답해서 못 읽겠다는 리뷰가 괜히 즐비한 게 아니다. 웨스-자신을 등쳐먹은 사기꾼이 자신의 장례를 치뤄 줄 테니(1년 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은 차치하고서라도) 몸과 마음을 바쳐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마저 하는데, 오죽했으랴.
“얼굴의 이 상처도 며칠만 더 지나면 말끔히 사라져. 중요한 건 네가 너 자신을 보는 관점이야. 남의 집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부랑자로 보는가, 아니면 성공을 꿈꾸며 바람의 도시로 찾아든 패기만만하고 젊은 카우보이로 보는가, 관점에 달렸지. 네 허약한 껍질이 아니라 그 안을 꿰뚫어 봐야 해. 다시 거울을 봐봐. 너의 내면을 보라고.”
<1권>
“다시 따라 해봐. 나는 강하고 당당하다.”
“…… 나는 강하고…….”
“그게 뭐야. 말투에 전혀 맥아리가 없잖아. 삼시 세 끼 열심히 골고루 먹여놨거늘, 병든 수탉처럼 골골댈래? 소 이백여 마리를 혼자서 몰아댄 카우보이였다며? 다시 힘차게 따라 해봐. 신념과 갈망을 품고서. 나는 강하고 당당하다.”
“나는 강하고 당당하다.”
“그렇지. 나는 똑똑하고 대담하며 무엇이든 해낸다.”
<1권>
모든 사건의 정황을 아는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선 바보같은 제이의 행동에 울화통이 터질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정작 제이에게 있어 웨스와의 동업은 다시 일어설 기회가 되었다. 사기꾼의 동업자, 즉 같은 사기꾼이 되려면 말끔한 외모와 능수능란한 언변또한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엇보다도 당당함이 필요했다. 웨스는 쓸만한 일꾼 하나를 만들겠답시고 의도치 않게 제이가 자신감을 가지도록, 변하도록 도와준 셈이다. 병주고 약준다의 모범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장면 덕분에 추락하다 못해 지구 반대편까지 뚫고 들어가던 내 안의 웨스의 첫인상이 '괜찮네?' 정도로 바뀌었다. 노예계약 수준으로 제이를 부려먹을 속셈인 갱생 불가능의 사기꾼이지만, 진창을 구르던 사람을 끌어올려, 절망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웨스의 극진한 관리에 보답이라도 하듯 밝고 상냥한 면모를 되찾기 시작한 제이는 웨스에게 맹목적인 신뢰를 주며 유쾌하고도 아슬아슬한 2인조 사기꾼의 나날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사랑에 빠져버린 건,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물론 나는 배알없이 저런 똥차를 좋아한다고 짜증을 냈지만)
그러나 모든 소설에는 시련이 있기 마련이고, 투썸 투샷 또한 소설이기에, 결국 제이와 웨스는 크나큰 시련을 만난다. 유약한 것 같으면서도 다정하고 강단 있는 제이와 정이 들고, 마음을 나누기 시작하며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둔 채 '팔자 좋게' 제이에게 선물할 꽃다발과 샴페인을 사들고 오던 웨스가 골목에서 끔찍한 폭행을 당해버린 것이다. 웨스에게 당한 뒤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던 부패경찰 오스왈드의 소행이었다.
연애라도 하는 양 들떠서 꽃을 사 들고 샴페인을 사 들고 꼴좋았지.
놈들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놈이 자신을 알아본 것도 몰랐다.
일생일대의 실수였고 대가는 뼈아팠다.
누굴 탓하겠는가.
주제를 잊고 방심한 놈이 병신이었다.
<2권>
이 사건 이후 웨스는 자괴감 속에 파묻혀, 화풀이를 하듯 제이에게 가차 없는 폭언을 던지고(이따위 구제불능을 좋아하는 제이의 안목에 욕을 했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제이에게 대놓고 좋아하지 말라는 엄포를 두면서도(여기서 또다시 욕을 했다) 무의식적으로는 제이가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둘의 관계는 전적으로, 자기합리화를 위해 웨스가 내뱉은 논리적인 궤변을 받아들여 주고, 한결같이 곁을 지켜 준 제이의 덕이 컸다.
'그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 나는 악당의 악행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이 문구를 정말 싫어한다. 그리고 웨스는,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의 '좋은 녀석' 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엄연히 말하자면 더러운 성격과 사기 행각에 국한해 들어맞는다고 해야겠지만 웨스의 정체성은 사기와 더러운 성격이었기 때문에 세세하게 파고들지 않아도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을 것이다. 작품 전반적으로 보이는, 툴툴거리면서도 주변인을 생각하는 다정함과, 제이의 신뢰를 받으며 점점 변화하는 모습만 아니었다면 이미 애저녁에 투썸 투샷 읽기를 포기해버렸을 지도 모른다.
실컷 줄거리를 설명하다가 왜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느냐 묻는다면, 작품 전체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도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건이, 제이와 웨스의 관계가 변하는 분기점이 바로 웨스의 이 '다정함'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멍청하다고 매번 책망하고 괴롭혔던, 그럼에도 한결같이 자신만을 의지하던 덜떨어진 고향 친구 '베니'가 자신의 원한관계에 휘말려 살해당하자 웨스는 결단을 내린다. 내려야만 했다.
“놈은 이 세상에서 저만 믿었다구요.”
<2권>
자신이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조차 전에,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다. 웨스는 더이상 제 감정을 외면하고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이미 떠나간 소중한 친구에 대한 애정도, 어느새 마음 속에서 거대하게 자라나 버린 사랑도.
가차없이 행동하는 것만 같아도 마음 한 구석에는 다정함이란 감정이 존재하던 웨스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중요하게 여기던 자존심을, 사기꾼으로서 큰 건을 잡아 부자가 되리라는 목표를 포기한다. 베니의 복수를 위해 그토록 거리를 두던 고향에 내려가고, 제이와 함께하기 위해 여태껏 자신이 일구고 행하던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 버린다.
이로써 본편은 끝이 나고, 비로소 제이와 웨스의 사랑이 시작된다. 누군가는 미련하고 바보같은 짓이라 여길 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적어도 이 둘만은 그들의 선택에 있어 일말의 후회조차 없지 않을까.
소박하고 부드러운 마음씨, 늘 남을 배려하고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같이 나누려는 제임스의 마음이 맞잡은 손을 타고 흘러들었다.
웨스는 되돌려 주고 싶었다. 자신이 받았던 과분한 신뢰와 헌신을.
그로 인해서 깨닫게 된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인생의 가치와 일상의 소박한 기쁨을 자신이 얻는 만큼 되돌려 주고 싶었다.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양순한 카우보이에게.
<2권>
재력과 권력만이 강인함의 척도는 아니다. 사람의 강함이란 뛰어난 신체와 정신력을 이용해 상처를 입지 않는 것만으로 결정되지도 않는다. 어찌 본다면 유약하고 소심한 제이, 제임스가, 사실은 무척이나 강인한 사람이라는 것은, 웨스가 가장 잘 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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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웨스 때문이었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조금 있어, 책을 중도 포기할 위기가 몇 번 있었다. 그 중 하나로써, 알라딘과 내가 한창 주목하고 있는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보자면, 투썸 투샷의 여캐 활용 방식은 최악의 최악을 달린다. 뭐, 오로지 이한 작가님의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192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부터 짐작을 했어야 했는데. 내 불찰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시대 반영(비록 반갑진 않더라도), 잘 짜여진 개연성과 사건 전개, 인물간의 관계와 감정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입체적인 인물들이 투썸 투샷을 읽게 한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웨스는 분명히, 부인할 수 없는 악당이자 쓰레기지만 제이를 만났고, 제이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변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경험을 통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라고 충고를 하지만, 적어도 소설에서 만큼은 사람이 발전하고, 변할 수 있다고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제이와 웨스는, 서로를 누구보다도 아끼며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